교회는 전 교인의 전 생애를 위한 평생 성경 학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담 없는 출석을 위한 템플 체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공 예배의 말씀은 성경 강해이며 모든 사경회의 주제가 성경 연구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대의 회당처럼 교육하며 토론하는 성경 학교입니다.
성경학교의 자전적 목적
목회, 목양이란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목양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 출석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매일 먹어야 삽니다. 우리가 받은 일꾼의 일은 성직으로 부르는 반포자 Preacher 도 아니며 대사 Minister 도 아니라 Bible Teacher 교사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도 복음 전하는 자라고 아울러 말씀합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의 주된 핵심은 교육입니다. 복음을 받을 자나 이미 받은 자에게도 필요한 교육적 구분에 필요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뜨거웠던 열정을 회고하고 정립한 권면을 디모데 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세 가지 직책 모두가 가르치는 하나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고 쓰기 위한 교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일 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절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날카로운 검같이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일 년에 한번 전체를 정독했다는 일이 주요가 아니라 한 말씀 일지라도 양심을 흔들고 가치관이 깨지는 진리로 일 년을 사는 것입니다. 도전이었다가 묵상이 되고 진정한 회개를 알게 되어 결국 거듭난 생명으로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동행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제각각 판단하는 오늘의 적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그날에 사실과 역사하신 그분의 뜻이 오늘도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적 칼럼 같은 개개인의 해석보다는 객관적인 근거를 먼저 살피는 진중한 성경 공부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에 첫발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단 시일에 또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성경 연구에 매진한 성경 학자들도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 할 정도입니다.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보편적 도우심은 우리를 도우시는 교육입니다. 성령은 성경 교육의 기초를 인도하며 도우십니다.
성령의 첫째 교육은 첫째 진리로 인도하시고 지혜를 보게 하시며 그 속에 나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의 둘째 교육은 우리를 뜨겁게 감동케 하시며 이 충만함 가운데서 내가 철저하게 깨어지며 세상의 당연한 가치가 엎어지는 잊을 수없는 삶의 체험을 보이십니다. 내 인생이 예루살렘 성문에서 종려나무 가지처럼 흔들리기도 하며 갈대와 같이 꺽어지는 아골 골짜기에서도 동일한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 교육은 그의 충만함으로 흐르게 하십니다. 나로 행동케 하십니다. 첫째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가르치십니다. 둘째는 나와 성령의 인격이 동화되어 강력한 역사를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는 나의 도전과 간구를 지원하십니다. 이 모두가 보혜사 성령의 완전한 세우심입니다.
성경학교의 커리큘럼
성경의 기록은 기원전 3600년 경 모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역사로 비교하면 환웅시대 이전의 고대 역사가 배경입니다. 모든 인류의 기록 중에서 이처럼 장대하고 상세한 고대 기록은 찾아보기도 힘들뿐더러 전무한 역사입니다. 이 진귀한 성경은 고고학적 학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각각의 시대에서 즉 모세의 기록부터 사도 요한의 기록까지 약 4천 년의 시간을 지내면서도 그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 년 동안도 계속 함께하는 아직도 진행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단순히 내용을 읽고 아는 것에서 지나 오랜 역사의 동질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쉽고 간단하리만큼 명확하지만 그 풀이와 경험은 닿는 이마다 다 다를 만큼 넓고, 진중함이 깊고, 새로운 창조를 만나듯이 심오합니다. 이 명확하고 단순한 선포를 찬양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고백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만남과 배움이 나에 평생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성경 학교는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마가의 성경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자랑은 문답과 대화로 교육하셨던 예수님의 성경 학교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한 개인의 평생 성경 공부를 위해 질의와 답변과 상담, 이 개인적인 교육 과정을 준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기 평생 성경학교에서 국어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외국어는 각각의 성경을 연구한 주석입니다. 수학은 신학자들의 신학론입니다. 우리의 국사는 2000년 전 세계 교회의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배움의 제시를 준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장성하는 성도에게 평생 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예수님 앞에선 누구도 평신도나 교역자로 불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평신도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평신도로 당신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란 의미는 가르침 앞으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전까지가 평신도입니다. 이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쉽게 전하는 메신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쉽고 간결하게 알 수 있지만 예수님 말씀의 배경인 성경을 더 아는 것은 더 명확하고 정확한 풀이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풀이가 뒤따릅니다. 제자들의 교육 기간이 3년 최종 대학원 과정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3년은 공생에 기간이지 제자들의 교육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때가 이르매 순식간에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간의 많은 가르침이 깨어난 것입니다.
성경학교의 새로운 몽학선생
사역자란 이 가르침을 친절하고 쉽게 베풀어야 합니다. 권위를 내세우고 우월한 위치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를 교사를 넘어 인생의 멘토로 삼습니다. 성경 교사란 개개인에게 맞춘 평생의 벗이 되는 일입니다. 교육하고 권면하며 때로는 질책하는 허물없는 벗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함에 권위를 말한 것은 주의 일을 함에 그가 연소함으로 업신여기는 마귀의 시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30세에 시작하셨습니다. "청년예수"란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 아들의 나이는 이 우주의 나이입니다. 연소함에 업신여기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마귀의 궤계를 알았습니다. 정작 바울 자신은 모든 가르침에서 친구와 같은 친밀함으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범되게 행함을 원했습니다. 권위를 억지로 만들지 말고 말씀 속에서 섬김의 위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선지적 예언과 가르침의 은사와 섬김의 종으로서 또 한 사람의 랍비를 세상에 보내는 사명자가 교사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기본은 한결같은 벗이며 겸손한 충고입니다. 출석 교회를 고르는 일은 헛되고 무의미합니다. 성경 말씀에 진심인 목자를 전심으로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대량으로 크리스찬들을 양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당신의 소중한 삶을 위한 진실한 개인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인 것은 이스라엘 지파를 예표하는 상징의 수가 아닙니다. 12명의 개인 교습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능력이 있으시지만 12명의 자유로운 영혼들의 방황을 일일이 잡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속 마음까지도 보셨으며 그들의 의심까지도 물어봐 주셨습니다. 12명을 이렇게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공동체란 대규모 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의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공동체의 소망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교육은 오늘의 학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목자란 내가 얍복강가에서 씨름했던 천사와 같은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두고 함께 씨름 할 선생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목자라면 당신의 인생에 무엇이 유익이겠습니까? 참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친구 같은 선생을 만남은 은혜입니다. 평생 함께 할 이 같은 스승이라면 성령의 예정하신 운명입니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아합왕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외로운 옐리야였지만 그는 기도 중에서 의로운 7천의 교회를 찾았듯이 우리를 위하여 반듯이 예비하셨으리라 믿기를 바랍니다. 계속하여 스승을 찾고 당신의 신앙을 질문하기를 바랍니다. 그 간구를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노션 개발진 캐릭터로 응용해서 만든 필자. d-.,<b (3/21.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