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택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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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택한 삶. 로마서 4 : 18 - 25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서 섭리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하였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12장 2절에 말씀은 아브람이 곧 선택하여 부르시는 예정의 첫 시작이며 선민의 표준으로 삼았음을 의미합니다. 선민이란 혈통이나 전통의 자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체결된 계약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선민이란 믿음이 유지되고 있는 인생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 율법에 있지 않고 율법 이전 아브람의 세대부터 여호와의 택함의 기준이 믿음에 있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민이란 유전이 아닌 오늘을 사는 믿음에 관한 모든 선택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생생한 믿음으로 하여금 정확히 무엇을 행하게 했는지를 말씀의 깊이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은 아무도 아니며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의 후손도 선민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요 후손들로 부르셨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성품으로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의 전제는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바라고 믿었다”는 믿음의 것입니다. 100세에 자녀가 없는 그에게 여호와께서는 그의 세대적 자손에 관한 이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믿게 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각자의 재량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같으리라" 여호와의 택함이 약속하신 계약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믿음의 성품을 입은 ...

용서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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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Our Saviour Saw from the Cross. (1886-1894) 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 French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법은 490번의 계산적인 용서가 아닌 이상적 상징이다. 이는 과거에 쌓여진 사건에서 큰 용인을 결단하게 하는 반교육적 예시이다. 용서가 필요할 사건이란 병적 피해 망상이 아닌이상 일반적으로 다수의 사건을 전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사소한 사건들은 대부분 시간 적응을 통해 무시되거나 잊혀지는 심리로 귀결된다. 이전에 경험했던 피해들은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거나 새로운 더 큰 사건으로 대부분 대치 된다. 현실은 490번의 용서를 해야 함 보다 490번의 피해를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아시는 주님은 490번의 과거를 잘 마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만날 용서에 대해 부탁하는 질의 응답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심리적 속성을 꿰뚫고 계신다. 몇 번을 용서함이 의인의 아량일까?하는 질문에 앞으로 490번이나 이럴진데 이미 지난 일에 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씻는 건 어떠하냐는 식의 예수님만의 특별한 귀납적 화법이다. 그러면서 미래에 있을 용서까지도 생각해 볼 사고의 여지를 주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정체 된 것이 아니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 오늘도 항상 유지 되어야 하는 지속적 삶이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미래의 용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본성에 관한 일에 결과이므로 준비하거나 예상할 수도 없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반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군가를 계속 용서해야 할 사안이 예상된다면 지금 한번의 용서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 저 짓을 보고 있다면 용서에 관하여 이것이 완전한 방법일까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