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 현천교회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2Cor 6:2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제임스 티소. 작)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의 한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제임스 티소. 작)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법은 490번의 계산적인 용서가 아닌 이상적 상징이다. 이는 과거에 쌓여진 사건에서 큰 용인을 결단하게 하는 반교육적 예시이다. 용서가 필요할 사건이란 병적 피해 망상이 아닌이상 일반적으로 다수의 사건을 전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사소한 사건들은 대부분 시간 적응을 통해 무시되거나 잊혀지는 심리로 귀결된다. 이전에 경험했던 피해들은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거나 새로운 더 큰 사건으로 대부분 대치 된다. 현실은 490번의 용서를 해야 함 보다 490번의 피해를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아시는 주님은 490번의 과거를 잘 마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만날 용서에 대해 부탁하는 질의 응답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심리적 속성을 꿰뚫고 계신다. 몇 번을 용서함이 의인의 아량일까?하는 질문에 앞으로 490번이나 이럴진데 이미 지난 일에 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씻는 건 어떠하냐는 식의 예수님만의 특별한 귀납적 화법이다. 그러면서 미래에 있을 용서까지도 생각해 볼 사고의 여지를 주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정체 된 것이 아니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 오늘도 항상 유지 되어야 하는 지속적 삶이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미래의 용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본성에 관한 일에 결과이므로 준비하거나 예상할 수도 없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반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군가를 계속 용서해야 할 사안이 예상된다면 지금 한번의 용서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 저 짓을 보고 있다면 용서에 관하여 이것이 완전한 방법일까 회의하게 된다. 어쩌면 익숙해진 용서는 용서가 아닐 수 있다. 용서란 방법이 요연한 사건이거나 시험할만한 스스로의 잣대를 지나 매우 충격적일 수 있는 일에 붙여야 할 거대한 결단일 수 있다. 어찌보면 지속적인 용서는 삶에 있어서 가변적 한계이다.


490번의 이상적 수의 대입이 과도하게 강조한 것이기 보다 우리가 할수록 없음을 이미 아시지만, 도달할 수 없는 용서의 수긍을 주문하신다. 어떤 용서가 당연하지 않았다 해서 죄책감에 까지 내려가거나 포기하지는 말아라 오늘의 용서는 490번 중에 대입 중인 것이다. 단지 마음에 거스르는 것을 두어서 이러한 시험에 대처하는 면역을 키우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용서 받을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늘 그것을 달고 산다. 그러나 이처럼 용서에 대해 고심하는 자라면 그가 받을 용서 받음이 어쩌다가 한번의 사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함 받는 조건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한번의 용서나 많은 용서나 마음 의 근본 뿌리에서의 역사이다. 요셉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그 한번의 사함이 생명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많은 용서를 감내하게 된다.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함께함을 믿는다.


그분을 대면할 때 최후의 변론은 용서일 것이다. 용서는 용서의 대상들에 문제가 아니라 용서 하는자의 의식에 가치이다. 어차피 쭉정이는 다 불사를 때 전혀 다른 차이를 증명하게 된다. 이 차이란 심령의 근본적 차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조건이나 기회, 천국의 정치적 기반이나 인간의 관계 개선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집에 거하는 자에게 용서는 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자인가? 이다. 용서의 결과가 품을 목적이 아니라 용서할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용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 거룩함에 나아감에 차이가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의 뜻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용서를 몇 번 했느냐로 가늠하지 않는다. 다만 저가 알곡 인지를 분별한다. 그 선함의 dna를 기뻐하신다. 그것으로 더 크게 갖추어진 한 인격이 되는 것은 다 차이가 있지만 장남과 차남의 차이일 뿐이다. 용서는 선함을 시험 받는 또는 연단하는 주요한 과정이다. 예수님의 490번에는 쉽게 이해할 예시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물었던 그날 질문을 두고두고 되물을 예언적 계시로 답하셨다.


오늘 제자들의 의구심에도 그 복잡한 마음을 시원하게 씻을 용서가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 한다. 240423.



그림.

What Our Saviour Saw from the Cross. (1886-1894) 

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 French


2024년 4월 23일 하늘색 언덕 현천교회에서 김관석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