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 현천교회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2Cor 6:2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

친애하는 데오빌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 : 1 ~ 4


친애하는 데오빌로


누가는 서문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개인적인 문안을 담고 있습니다. 진리는 한 개인을 통하여 인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모세, 이사야, 마틴루터 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보통 이들 소수의 특정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들 소수는 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들 입니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아무나 경험 할 수 있는 극히 우연한 기회입니다. 매우 값진 기회 입니다. 누가의 이 개인적 문안이 이러한 만남을 얼마나 소중히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한번의 가르침은 하나의 불씨처럼 흩어져서 산 하나를 통채로 옮길만한 엄청난 역사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의 서문은 이제 불씨가 시작되는 그 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의해 기록된 첫번째 성경입니다. 그 복음이 이제 다른 이방인에게로 전달되는 순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들은 참된 선생 입니다. 마가도 베드로의 진술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과 사역을 함께했지만 바울 역시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은 복음서 연구에 뼈대가 될 정도로 중요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건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었고 이제 사도행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중요 기록의 저자가 이방인 누가 입니다. 복음의 무오함이 이제 사도들에게서 나와 씨앗 그대로 나타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누가의 기록을 많은 역사가들은 중요한 역사적 가치로 인정하는 것은 그가 서두에 기록했듯이 이 일에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연구였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일에 관하여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많은 말로 영감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영감이란 자기 계시적인 것으로, 별이 스스로를 빛나다 하거나 꽃이 스스로를 향기롭다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감추는것에서 이 역사를 덧붙임이나 과시함 없이 순수하게 나타나게 했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본 받을만한 마음이요 누가의 숭고한 인격입니다.



Saint Luke Painting the Virgin 1565 Giorgio vasari
예수님의 일생 첫 사건 동정녀 마리아를 기술하는 누가를 화가로 비유하여 담아낸 작품.
누가복음을 상징하는 소를 화가 뒷편에 그려 넣었다.



누가는 거룩한 매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서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기록하였고 누가도 이들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인쇄술이 없었고 기록물을 유지하는 길이 있다면 직접 손으로 수기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런일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구약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라 첫 마디처럼 우리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이 이것을 기록 하는것은 단순히 역사의 전승이나 지식의 전파를 위한 행동들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이 이 복음을 기록하고자 했던 이유는 역사를 조사하고자하는 호기심도 지적활동에 기인한 가르침의 결과도 아니였고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것도 결코 아니였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그 사실에 대해 그들의 마음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거룩한 진리에 매료되었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그들을 강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그들의 붓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학적 문헌들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숨 쉬게 하고 역동하게 하는 그 진실의 사실들에 대하여 고무된 거룩한 열심의 산물입니다. 언제나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진실을 만나는 것은 이런 여파를 느끼게 되는 것 입니다. 세상의 어떤 지식이 이렇게 강력하게 견인하며 세상에 어떤 문학이 이런 매료를 나타낼 수 있습니까? 기독교 진리의 매력을 능가 할 수 있는 진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가 그 많은 이들이 붓을 든 이유 입니다. 그처럼 많은 복음서들이 쓰여진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매력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시며 또한 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진리를 가르치게 하십니다. 복음은 가장 강력한 가르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가장 강력하게 달려갑니다. 세상의 어떤 전파보다도 빠르며 정확히 유포 됩니다. 이 복음이 유포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들 마음 속 깊이에까지 이르러서 두드리며 마음을 동화하는 것은 이 지식이 실제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거룩한 매력에 사로잡힐 때만이 그것을 글로 쓸 수 있습니다. 이 매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진리를 계시 받고 진리에 의한 내적인 이상에 빠지는 사람만이 그 미묘한 기적을 쓰며 누가의 복음서처럼 읽히고 또 읽게 되는 것입니다.



St.Luke the Evangelist 1804 Vladimir Borovikovsky


누가의 기록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대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다수를 위해 집필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을 위한 기록입니다. 그 사람에게 딱 맞춘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분명 이 거룩한 문헌을 기록하기 위하여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 역시 사도들로 부터 전하여 들은 그대로를 저술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 왜? 누가는 그들의 기록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누가만의 가르침의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전해들어 기록한 기록물들은 대부분 두명의 저작 시점을 갖습니다. 전하는 사람의 내용과 기록한 사람의 기록 의도와 방식들이 그것을 대변하는데, 이러한 글들은 분명한 주제를 말함에 견제를 받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것을 교육적 방법으로 재고했습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연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 그 모든일을 근원 부터 자세히 미루어 ...” 살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데오빌로에게 차례대로 보게 하였습니다.


연속성과 연계하여서 그의 배운바에 확신을 갖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근원으로 부터라고 말하였듯이 그는 구약의 기록까지 상세하게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나심 이전부터 성장하심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사역을 시작함에 필요한 모든 당위성까지 기술하고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교회에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지금도 살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순서대로 연대별로 그 근원과 함께 기록합니다.


이것은 진실된 복음을 받은자가 한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여 기록한 사랑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으로 이 사실을 뜨겁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전 세계 모든 문학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장엄하고 우아한 필력에 시대를 초월하여 각 시대 문학가들에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직업이 의사였습니다. 그가 바울과 오래 동역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식인이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누가복음의 문장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그 거룩한 매력에 모든 재능과 열정을 기울인 결과입니다. 누가의 말대로 많은 기록이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완전한 복음서로 남을 수있었던 것은 그의 진실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셨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불완전한 복음서들이 존재 할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숨쉬듯 살아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예수의 기록물들을 제3의 복음서라고 언론을 통해 억지로 게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생각도 없고 단순히 자신이 발견한 가치만을 떠드는 일에 불과합니다. 복음이란 읽혀야 합니다. 듣고 감동되며 삶을 통체로 뒤바꾸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에 감격하여 다른이에게 그의 구원하심과 은혜를 전하기위해 내 모든 것을 다하는 일. 그것이 완전한 복음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이 장편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세심한 배려는 희생에 가까우리 만큼 성실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에게 데오빌로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있었을까?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워 그 많은 글들을 썼을까? 그 노력 가운데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복음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복음은 대량으로 살포되는것이 아님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천명을 먹이셨지만 복음이 그들 모두에게 나타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 소수의 제자들을 위한 길이였음을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리 잃은 양을 위하여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그 만을 위한 모든 준비하심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록된 것이 복음서입니다. 그럼으로 누가도 그 한사람을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 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의 전도 기록입니다. 그가 혼신을 다해 만든 전도지 입니다. 누가의 전도 방법을 들어서 하나님은 복음서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면류관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고자 하는 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며 얼마나 수고 하고 있습니까? 세계적 부흥사 무디 목사님은 자기 평생에 전도한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가 자기 집 가정부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무엇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그 분께서 내죄를 때문에 죽으시고 나를 살리신 그 사건을 전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믿으라고 말은 하는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할 수 없는 소리는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가 복음이 아님니다. 복음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셨듯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것이 제자의 도 입니다.


자 이제 복음을 전합니다. 지식으로 하는것이 아님니다. 상황과 수단으로 하는 것이 아님니다. 자 이제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처럼 참된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삶으로 증명되었고 그의 전도 열심이 늘 신실하고 정직합니다. 데오빌로는 생각합니다. 누가를 보면 배우고 싶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진실됩니다. 이제것 배웠던 것들이 그로 인해 명확해 졌고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이 생기고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복음은 없는것을 전하는것이 아님니다. 억지로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허락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급하게 빨리,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분명한 목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님니다.


나에게 이루어진 사실이 먼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신앙고백이 없이 전하다가 무시당하면 부끄러워합니다. 전하다가 대립하게 되면 포기합니다. 전하다가 핍박당하면 시험에 듭니다.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 내 삶에 없다면 불완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해하는 일입니다.


누가의 이 편지는 회자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의 고백이 진실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복음이 영원합니다.




참고문헌  : 
1.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1892) J. WILLCOCK.
2.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1979) Matthew Henry.
3.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1996) Darrell L. Bock.
4. the Calvin commentaries (1540) John Calvin.

2016. 3.20. Writer. Gwan-Sok, K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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