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 현천교회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2Cor 6:2

믿음이 택한 삶. 로마서 4 : 18 - 25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서 섭리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믿음이 택한 삶



믿음이 택한 삶.

로마서 4 : 18 - 25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서 섭리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하였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12장 2절에 말씀은 아브람이 곧 선택하여 부르시는 예정의 첫 시작이며 선민의 표준으로 삼았음을 의미합니다. 선민이란 혈통이나 전통의 자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체결된 계약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선민이란 믿음이 유지되고 있는 인생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 율법에 있지 않고 율법 이전 아브람의 세대부터 여호와의 택함의 기준이 믿음에 있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민이란 유전이 아닌 오늘을 사는 믿음에 관한 모든 선택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생생한 믿음으로 하여금 정확히 무엇을 행하게 했는지를 말씀의 깊이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은 아무도 아니며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의 후손도 선민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요 후손들로 부르셨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성품으로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의 전제는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바라고 믿었다”는 믿음의 것입니다. 100세에 자녀가 없는 그에게 여호와께서는 그의 세대적 자손에 관한 이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믿게 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각자의 재량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같으리라" 여호와의 택함이 약속하신 계약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믿음의 성품을 입은 후손의 등장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거룩한 성품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음 세대의 진정한 연결을 말합니다. 그것을 여호와께서 보장하신다 하십니다. 이 영의 예찬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대이며 아브라함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두 번째는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혈통에 "이같은" 믿음에 대하여 실현될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믿음이 구원을 완성할 또 다른 후손에 관해서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중에는 그리스도에 관련된 약속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내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고 그를 보고 기뻐했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참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의심 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족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느니라” 다시 말하면 상황과 현실 또한 과학과 이론적으로 도저히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사실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다. 어느 면으로 봐도 희망의 빛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확신을 가지고 믿었습니다. 본문 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강하게 그것을 확신했다” 번역 하였습니다. 믿음에 확신은 불에 기름을 붇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사도 바울이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확신이 있었기에 그가 믿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약속을 확신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 5절에 아브라함은 그가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합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람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새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증거했습니다. 우리도 옛 이름을 버렸다면 거듭난 새 이름을 세상 모두에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됨에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의 뜻은 새 부대에 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그대로 확신했습니다. 본문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였습니다. 의심을 두고는 믿음은 사상누각이 됩니다. 의심이 믿음에 양면 같이 보이는 것은 세상에 기준입니다. 애초에 믿음은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의심이 있음을 핑계 합니다. 사가랴의 작은 의심은 그의 근심과 의심의 말들에게 벙어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의심에 입을 불로서 지지니 그의 영이 나음을 입습니다. 믿음이 더 견고하여 져서 서판에 주신 이름 "요한" 이라 쓰니 입이 열리고 혀가 풀어져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강하고 하고 충성되고 능력을 부여합니다.


소년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떠는 블레셋 거인 골리앗과 대전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믿음으로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육신을 죽이는 자를 무서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불에 던지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꼭 믿는 사람은 세상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앞에 붙들려 온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비록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저희 신앙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상에게도 우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제라도 너희가 내 말을 듣게 되면 좋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지울 것이니 누가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질 수 있겠느냐?”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타협으로 협박했습니다. 이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기를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을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우리 몸이 불에 살라 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아멘. 저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에 바벨론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두렵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 합니다. 믿음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확고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절대 승리할 수 없습니다.


본문 19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옛말에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괴로울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믿음이 약해질 수 있는 조건에 있지만 약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무의식적 도피처가 아닙니다. 자기도취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그대로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나쁜 상황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는 하나님 만을 바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주님을 보는 동안에는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순간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어려움만 보았기 때문에 어려움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신앙 입니다. 신앙은 문제를 두고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신앙은 난관을 극복합니다. 신앙은 문제를 똑바로 보고 그 위로 올라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설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 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환난과 역경 속에서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잊었다.”고, 버렸다고, 안 계신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6장에 이것을 마귀가 던지는 ‘불화살’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들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승리한 것은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이 땅으로 돌릴 때 유혹에 걸리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내 마음 전체인 것 같지만 믿음의 성립에 99%는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하시며 손을 내밀어 붙드셨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전혀 없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고 배에 물이 넘쳐 들어올 때 공포에 빠진 제자들은 선생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내버려두십니까?”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변화산 아래서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할 수 있거든 제 아이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할 때에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은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때 소년의 아버지는 “주여, 제가 믿습니다. 저의 믿음이 적음을 도와주소서.” 하였습니다. 믿음을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지금 믿음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택하신 선민의 삶입니다. 믿음의 능력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만일 너희가 믿음을 겨자씨만큼만 가져도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우라 하면 옮기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했습니다. 백부장은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에 오실 필요 없이 “말씀만 하옵소서.” 했습니다. 그때 주님 하신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아본 적이 없다.” 칭찬하시면서 “네 믿음대로 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드라마 명 대사가 아닙니다. 매일 시험 받는 선택지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오시고 그 삶에 동행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후손들의 인생인 줄 믿습니다. 오늘의 아브라함이 여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2024년 9월 11일 삼일 저녁 예배 중에서 김 관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