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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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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Our Saviour Saw from the Cross. (1886-1894) 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 French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법은 490번의 계산적인 용서가 아닌 이상적 상징이다. 이는 과거에 쌓여진 사건에서 큰 용인을 결단하게 하는 반교육적 예시이다. 용서가 필요할 사건이란 병적 피해 망상이 아닌이상 일반적으로 다수의 사건을 전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사소한 사건들은 대부분 시간 적응을 통해 무시되거나 잊혀지는 심리로 귀결된다. 이전에 경험했던 피해들은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거나 새로운 더 큰 사건으로 대부분 대치 된다. 현실은 490번의 용서를 해야 함 보다 490번의 피해를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아시는 주님은 490번의 과거를 잘 마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만날 용서에 대해 부탁하는 질의 응답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심리적 속성을 꿰뚫고 계신다. 몇 번을 용서함이 의인의 아량일까?하는 질문에 앞으로 490번이나 이럴진데 이미 지난 일에 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씻는 건 어떠하냐는 식의 예수님만의 특별한 귀납적 화법이다. 그러면서 미래에 있을 용서까지도 생각해 볼 사고의 여지를 주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정체 된 것이 아니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 오늘도 항상 유지 되어야 하는 지속적 삶이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미래의 용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본성에 관한 일에 결과이므로 준비하거나 예상할 수도 없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반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군가를 계속 용서해야 할 사안이 예상된다면 지금 한번의 용서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 저 짓을 보고 있다면 용서에 관하여 이것이 완전한 방법일까 회의...

성경에 기초한 확실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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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전 교인의 전 생애를 위한 평생 성경 학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담 없는 출석을 위한 템플 체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공 예배의 말씀은 성경 강해이며 모든 사경회의 주제가 성경 연구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대의 회당처럼 교육하며 토론하는 성경 학교입니다. 성경학교의 자전적 목적 목회, 목양이란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목양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 출석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매일 먹어야 삽니다. 우리가 받은 일꾼의 일은 성직으로 부르는 반포자 Preacher 도 아니며 대사 Minister 도 아니라 Bible Teacher 교사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도 복음 전하는 자라고 아울러 말씀합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의 주된 핵심은 교육입니다. 복음을 받을 자나 이미 받은 자에게도 필요한 교육적 구분에 필요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뜨거웠던 열정을 회고하고 정립한 권면을 디모데 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세 가지 직책 모두가 가르치는 하나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고 쓰기 위한 교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일 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절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날카로운 검같이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일 년에 한번 전체를 정독했다는 일이 주요가 아니라 한 말씀 일지라도 양심을 흔들고 가치관이 깨지는 진리로 일 년을 사는 것입니다. 도전이었다가 묵상이 되고 진정한 회개를 알게 되어 결국 거듭난 생명으로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동행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제각각...

성경과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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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이야기는 의도가 있다. 많은 신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신화도 독자를 의식한 상대 시점을 빼놓을 수는 없다. 독자를 염두 한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창작자와 독자를 절대 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치 신들의 이야기만을 기록한 것 같지만 그곳에는 반듯이 청중을 위한 창작의도를 담고 있다. 어떤 신화들은 상징적 공감으로 여러 사람들의 관점을 지나 구술 되기도 했다. 이 많은 신화들은 여러 세대를 이어온 공감으로 되어 진 공동의 작품들이다. 이 공감의 목적은 그들의 땅과 삶을 걸러낸 변하지 않는 정체성에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의 대상은 변함없이 독자이다. 신화는 부족에서 민족에 까지 혈연적, 연합적 동질성을 상징화하고 암시한다. 신화의 가치를 더해주는 신비. 신비를 통해 관심을 불러낸 이야기가 그저 가벼운 소리에 지나지 않고 그것에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을 더했다면 그것은 자긍을 초월하게 된다. 신화는 신비로 이끌어 내어 다시 고유한 인격으로 해석한다. 이 신비는 고유한 인격으로 정체 할 때 가치를 갖는다. 인간은 이 경외함의 절정에 고취된다. 자신의 본질을 천명하는 이 기반은 나름의 영원한 이름이 된다. 이처럼 신비 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해당 사건을 통한 소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낸다. 신비적 경이만으로 신을 이해함이 아니다. 신비 하나하나는 크건 작건 간에 모두 어떠한 사건을 위한 서술형 주제들이다. 신비의 주체는 신이었지만 그 신비의 목적하는 바는 다르다. 이처럼 원시의 신화는 각각의 인간 집단에 고유한 정체성을 교육하고 기억하게 하는 완전한 정의가 된다.  되풀이 되고, 재발견 되고, 다시 쓰는 역사. 이처럼 신화는 각각의 고유한 원화로 채색되며 여러 세대에 거처 착색되어진다. 원화들의 특징은 단순 명확하다. 그리고 이 원화에서 인간의 개별적 혹은 체험적 신화로 더해지는 것이 역사 신화이다. 역사 신화는 신성이 부여된 인격의 사건으로 시대의 인물들로 영웅적으로 그려진다. 원화를 충족 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