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이야기는 의도가 있다.
많은 신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신화도 독자를 의식한 상대 시점을 빼놓을 수는 없다. 독자를 염두 한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창작자와 독자를 절대 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치 신들의 이야기만을 기록한 것 같지만 그곳에는 반듯이 청중을 위한 창작의도를 담고 있다. 어떤 신화들은 상징적 공감으로 여러 사람들의 관점을 지나 구술 되기도 했다. 이 많은 신화들은 여러 세대를 이어온 공감으로 되어 진 공동의 작품들이다. 이 공감의 목적은 그들의 땅과 삶을 걸러낸 변하지 않는 정체성에 부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의 대상은 변함없이 독자이다. 신화는 부족에서 민족에 까지 혈연적, 연합적 동질성을 상징화하고 암시한다.
신화의 가치를 더해주는 신비.
신비를 통해 관심을 불러낸 이야기가 그저 가벼운 소리에 지나지 않고 그것에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을 더했다면 그것은 자긍을 초월하게 된다. 신화는 신비로 이끌어 내어 다시 고유한 인격으로 해석한다. 이 신비는 고유한 인격으로 정체 할 때 가치를 갖는다. 인간은 이 경외함의 절정에 고취된다. 자신의 본질을 천명하는 이 기반은 나름의 영원한 이름이 된다.
이처럼 신비 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해당 사건을 통한 소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낸다. 신비적 경이만으로 신을 이해함이 아니다. 신비 하나하나는 크건 작건 간에 모두 어떠한 사건을 위한 서술형 주제들이다. 신비의 주체는 신이었지만 그 신비의 목적하는 바는 다르다. 이처럼 원시의 신화는 각각의 인간 집단에 고유한 정체성을 교육하고 기억하게 하는 완전한 정의가 된다.
되풀이 되고, 재발견 되고, 다시 쓰는 역사.
이처럼 신화는 각각의 고유한 원화로 채색되며 여러 세대에 거처 착색되어진다. 원화들의 특징은 단순 명확하다. 그리고 이 원화에서 인간의 개별적 혹은 체험적 신화로 더해지는 것이 역사 신화이다. 역사 신화는 신성이 부여된 인격의 사건으로 시대의 인물들로 영웅적으로 그려진다. 원화를 충족 하는 듯 하지만 이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인물들로 재 증명되어 존재를 확인하며 반면 원화의 고유한 신성의 부여를 통해 지명과 통치를 공고히 한다. 역사신화의 다른 이름은 정치이다. 모든 신화는 이처럼 인간을 향한다. 신화 속에 담긴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인간의 사건들로 해석되지 않는 신화는 없다.
합의된 정체성.
모든 신화는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초월적인 사건도 실은 인간들의 암시적 합의에서 서술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합리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약속이 들어 있다. 알고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독자가 없다면 혹은 다른 민족의 신화가 얼마나 엉뚱한 가를 느껴본다면 어떤 신화의 주체도 의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구전이든 문장이든지 어떤 사건이 되었던지 인간을 비춰낸다. 이것 만으로도 감춰진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다. 실은 감춰 있지도 않다. 믿음의 편의를 위해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한 것 뿐 이다.
신화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경의 오류.
성경을 신화로 보는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의 기본적인 신화의 맥락에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역사, 독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다른 신화들과 다른 것은 성경에는 독자나 정치적 의도 등에 관점을 두지 않는다. 성경을 단순히 신화로만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가 알고 있다. 성경은 단순히 신화적인 입장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이는 앞에 신화를 논박했던 모든 사안을 대비 한다 해도 모두 다른 결과에 다다른다. 그것은 성경의 신화는 독자를 다루는 방법이 매우 특별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뜻과 배경은 분명히 인간 독자에게 있지 않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구별한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 두 권으로 부르지만 성경은 66권의 책을 합본한 책이다. 성경의 구석구석을 다 설명하자면 매우 방대할 것이므로 신화의 주체로 시작한 본 사고로만 보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의 유일 신 여호와만을 말한다. 여호와는 생명과 실제 하는 실체이다. 그럼으로 먼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실체 하는 근본의 신(아버지)을 따라서 나서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성경은 이 실체에 관한 증명을 기록한다. 성경은 인간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의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유와 무에서의 실제적 창조의 가치를 말하기 때문에 첨단 과학의 시대에서도 성경의 창조론은 어떤 가설보다도 인정받는다. 그것은 존재의 시작과 가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모든 처음이요 스스로 존재하는 분임을 설명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목적이다. 구약 전체가 이스라엘이나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만을 나타낸다. 오로지 지존하는 한 존재가 자신의 뜻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나타내고 있다.
진리는 변질되지 않는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고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과 뜻은 하나님 안에 것이지 우리의 것인 냥 말할 수 없다. 분명 그와 같은 일을 우리에게 계시하시지만 그것은 우리 알바 아니요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게시는 그것으로 충분 한 것이다. 성경에는 저자도 독자도 없다. 이 모두가 신의 관점이라면 믿겠는가? 과연 진짜 신이라면 자신을 어떻게 고지할까? 절대적 신이라면 전능한 힘을 통하여 영원한 진리를 어떻게 나타낼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그 초월하심도 알게 한다. 모든 이가 점차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는 목적을 지금도 이루고 계신다. 성경은 그것에 처음이다.
현대의 다원화된 해석주의와 성경.
신화의 학문적 고찰은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과 신학자들에게서 이미 많이 연구되고 보편적인 지식으로 만나 볼 수 있다. 이제 현대인들은 본 주제의 지식 정도는 상식의 범위 안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해서 신화에 관련한 여러 학계의 관점을 전면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본 글의 취지는 그들의 관점을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을 좀 더 신학적인 입장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성경을 각계의 시선이나 주관적인 해석을 붙여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본 진의를 떠나 왜곡된 편견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고학만으로 철학 전체를 대변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그 일을 정론으로 받아 드릴 수는 없다. 학문 간에 입장도 그러한데 수천년간 기록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성경은 앞에 말한 모든 학문의 입장을 다 포괄한다 하여도 그 실마리를 풀기는 불가능하다.
지혜가 없는 세대.
성경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책 중에 책이다. 성경은 모든 학문의 시작이지만 성경이 학문이지 않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실험적이고 보편적 지식에 수긍하면서 믿음의 진의를 상식적인 선에서 희석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부끄러울 정도로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쓰여지는 성경.
물론 성서적 지식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말씀에 관하여서 보혜사의 도움 없이는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보혜사를 이야기의 요소나 대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신화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성경을 과거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보혜사는 지금 나에게 한 호흡 한 호흡을 더해주시는 분이다. 내 안에 계시며 내 생명과 지금 함께 하시는 것이다. 나의 깊은 명상이나 방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의 소통을 매일매일 얻어내고 내 안의 생명을 새롭게 하신다.
오늘 과연 초자연적 사건이 실제 나타난다면 그것은 신화이겠는가? 성경은 오늘도 쓰여 지고 있다. 성도에게서 그분의 의도를 그 뜻 안에 분명하게 고지하신다.
2019년 2월 7일. 2019년 2월 16일. 붙임
Writer. Gwan-Sok, K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