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히브리계 애굽인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노예로 태어나 평생을 억압의 통치에 길들여진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습관처럼 배어있는 애굽의 노예근성은 그동안의 삶에 유일한 기준이기도 했습니다. 억압의 통치와 불의한 제도에 굴복된 삶은 그들에게 익숙할 생존력을 요구했습니다. 일부는 소극적 저항도 하고 또 일부는 비굴한 타협도 하지만 오늘 하루를 애굽이란 땅에서 살아내는 각각의 사유가 있었습니다.
청년 모세가 동족을 위기에서 도울 때에도 오히려 모세를 고발하는 자세를 취했듯이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문명을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의 이스라엘은 비록 노예였지만 손익을 계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착취와 학대가 당연한 시대를 만났지만 거대 문명의 이기와 풍요 속에서 민족의 존엄마저도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세대였습니다. 그들에게 현실의 타협들은 야금야금 넘어서는 편리하고 쉬운 습관이었습니다.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었지만 애굽 안에서 당연히 살고 있는 히브리계 애굽인이었습니다. 애굽의 사회에서도 빼버릴 수 없는 중요한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험이 있거나 약간의 불편함에도 애굽을 회상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넘어서 아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스데반은 설명합니다.(사도행전 7:39-40) 노예 해방은 꿈꾸던 이상적인 대의였지만 그 자유를 지탱할 힘이 없었습니다. 과거 애굽의 모든 것을 비교할 때 보다 애굽을 빼고는 나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익의 내면은 해방을 지속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부담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새로운 미래가 이스라엘로의 회복이 아닌 애굽의 좋은 것이 함께한 변화된 새 애굽으로의 귀속을 기대한 것입니다.
나. 불안에 쫓기는 습관
대탈주의 위기를 마치고 약속의 땅을 향한 대장정의 사유없는 정체는 큰 불안감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대장정의 푯대였습니다. 이 중요한 감독관의 부재가 민족의 미래를 불안하게 합니다. 불안한 조급함의 무력감은 불평과 짜증으로 바뀌었습니다. 대장정의 섭리에 앞서 하나님께서 주신 40일간의 안식과 정비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초석이 되어야 하건대 그 발판 위에서 민족의 도약을 절고 있습니다. 이 불안과 두려움은 애굽에서 살아온 노예의 삶에 연장이었습니다. 시대적 피해의식은 늘 위기를 긴밀히 주시하면서 그 무엇도 조심하고 의심하고 매 순간의 기회를 엿보는 긴장과 불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노예로 태어나 이토록 자유하고 오래동안 댓가없는 쉼을 쉬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노예가 아님에도 향방의 지시를 내려줄 절대적 의지가 필요했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바르게 색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순전한 믿음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한 잔치에서 새 옷을 입고도 어색하기만 한 탕자였습니다. 참 자유 속에서도 부자유한 옛 몸은 길들여진 습관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습에서 비롯된 모든 트라우마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죄 가운데선 우리의 불행을 마땅하다 하지 않으시며 함께 아파하시고 회복의 길을 예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한 약속의 보증을 오늘 지급해주시기로 그의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민족의 희망을 이스라엘의 손에 쥐여주셨습니다. 최근 일 년여 시간 동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내신 역사는 놀라웠고 지속적이셨습니다. 애굽은 난데없는 재앙에 곤욕을 치릅니다. 이 재앙들은 종교적 상징성 의미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간에 곤고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위로며 신호였습니다.
노예란 목숨을 내걸고 싸워 얻은 전리물이며 현실적 가용 재산입니다. 대민족의 해방이란 내외의 변란이 없고서야 이룰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울 다른 큰 세력이나 내부의 도움 없이 자신의 역사만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하십니다. 인류역사에 유래없는 이 엄청난 사건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 앞에서 꼭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출 13:16. 모든 불안을 씻기신 영광을 미간에 표로 달아주셨습니다.
열 번의 재앙, 그리고 바다를 갈라 건너게 하시며 세계 최강 바로의 전차 군단를 진멸하신 여호와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밤낮으로 백성을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사막에서 물이 터지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일용히 주시는 하나님. 아말렉을 도말하신 하나님의 권능은 숨기심이 없이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짜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이 숨 가쁜 여정에서 옛 애굽은 당연히 지워져야 했습니다. 그 안에서의 습관 된 죄악을 씻고 이제 새로운 법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도로서 새 삶의 시작과 행군을 나타낸 하나님의 시간이였습니다.
과거 애굽의 헛된 신들에서 비롯된 세속적 신앙을 소거하게 하시며 실제 살아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지도 않은 애굽의 신과 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이란 죄악 된 과거 살아온 생각들 그 풍속에 푹 빠져 있는 옛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은 의에 새 옷을 입혀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체도 없는 불안한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사랑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다. 강박과 부정의 이상행동
날이 갈수록 불안은 깊어지고 한 달을 넘어서 부터 작은 의심들은 소문의 진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불안의 해법에 집착하는 강박은 이상행동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묘한 감정들과 뒤섞여 있었습니다. 편리했던 애굽의 문명을 동경하고 즐기던 애굽의 문화를 회상하게 하는 것은 그들 몸에 배여 있는 향락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부패하였다 하실 정도였습니다. 쾌락의 기억들과 욕구불만이 꿈틀거립니다. 애굽에서 가장 즐거웠을 신들의 축제를 누군들 잊었겠습니까? 이들은 정확하게 '신을 만들라' 주장했고 보란 듯이 광란의 향응을 펼쳤습니다. 음악의 신, 춤의 신, 다산과 사랑의 신이 기억하는 욕구로 어우러져 익숙한 쾌락을 다시 맛보았습니다.
옛사람의 충동은 그들을 요란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출애굽이란 역사적인 대업마저도 민족의 정신이나 국가의 체계 마저도 죄에 종된 사사로운 욕심 앞에선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깍아내리고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부정합니다. 모세는 몇 달 전 르비딤에서 아말렉 군과의 전투를 치르고 아론과 홀, 그리고 여호수아의 선전함을 보았고 백성들에 각각의 역할분담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조언으로 체계를 세웠습니다. "재덕이 겸전한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 무망 하며 불의를 미워하는 자를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 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출 18:21) 이스라엘은 대 부족을 넘어 국가와 같은 새 법과 주관자들이 있었지만 이미 군중의 뒤틀어진 욕심은 옛 노예들에 무질서로 그들의 격정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첫째로 민족의 영도자 모세를 끌어내렸습니다. 그들은 '이 모세'라는 인격을 배제한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이토록 모세를 폄하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주인으로 이미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세 - 그저 하찮은 문제 중에 한사람에 관하여 '우리는 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그는 우리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 무시하고 그의 영향력을 조금도 인정할 이유가 없음을 비아냥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그 구름은 여전히 시내산 꼭대기에 머물렀음을 온백성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인도하여낸 불과 구름의 기둥을 그들 가운데서 목도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상 건데 구름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몰아치고 간혹 번뜩이는 섬광과 멀리 소리의 진동을 느낄 우뢰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표적은 계약 당사자 간의 확고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표적도 믿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이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합니다.
시내산 정상에서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사십일 주야 계속되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 관문에 섰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법에 준수하기를 서약하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천국 비자를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합니다. 하나님에 백성으로 봉헌되는 결정의 날이 옵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이 걸린 탈출과 도해 후 광야의 역경과 침략에서 안전하게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약속된 땅을 하사 받기 위해 진군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안정된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 평화를 의심하게 할까? 이 언약을 파기하게 하는 사특한 악행은 은밀하게 검은 누룩처럼 번져갔습니다. 빵을 만들려고 항아리를 여는 순간에 그것이 이미 못쓰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밥상에 참예하지 못하고 쓰레기 통으로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증거를 새기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놀라운 기적들을 그저 구경거리요 이야깃거리로 소모했습니다. 깊이 상고하지 못하고 그저 가십처럼 취급한 것은 애굽에서의 타의적이고 선정적인 삶에 뿌리가 깊었습니다. 그들은 옛 기호와 방식들을 비교하고 추억했습니다. 시내산의 도입은 사순절이 되어야 했건만 이스라엘은 그 고요한 평화와 안식이 하나님 안에 축복임을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요함을 견디지 못할 만큼의 불안으로 만들었습니다. 죄 된 옛 속성에 편리함을 그리워하고 다시 누릴 향락의 멍에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신의 대리자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권자를, 하나님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은 나일강 지류의 풍요로운 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도시들의 통합 왕국입니다. 애굽의 신은 각각의 도시 정체성을 상징으로 출현된 것입니다. 신화들은 역사를 구전하게 하는 좋은 도구였고 각각 왕조의 일관성을 부여하기 적합했습니다. 권력의 이동은 통치에 필요한 신학을 재 조합하여 적통승계와 합병을 공식화했습니다. 애굽의 최초 신화는 가족 단위 신에서 시작하지만 각 지역의 승계와 합병이 후대로 갈수록 조합이 복잡하고 다양하여서 수십 개의 신들의 조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애굽에 내려진 열 재앙이 애굽을 대표하는 신들을 예표 할 수 있다는 가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재앙은 추가된 몇몇의 사건 것과, 당시 고센 지역의 신들의 조합수는 열명의 신으로 함축하기에 많고 각 지역의 신들의 중요도도 각각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배웠던 권력의 새물결은 "신을 만들라" 였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신정정치 기반을 도구로 잡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문명, 대 제국의 기초적인 통치기반으로 삼은 신의 조합은 왕국의 이름을 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우상의 동질성과 통일성이 곧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출 우르에서 하나님께 기뻐하는 믿음의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애굽기는 그와 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동의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권념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서 비롯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르와 애굽을 떠난 배경은 같은 것입니다.
애굽은 높은 바벨탑이 아닌 지경에 넓게 편 또 다른 인본주의 바벨탑입니다. 옛 인간은 무지하고 오만하여서 거듭 진멸을 자초하지만 세대를 건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어찌 처음 보았겠습니까? 지구 상에 수없이 많은 생명을 허락하셨지만 그중에 특별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의 부르심은 존재의 의미와 창조의 비밀을 보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 그 특별한 인격의 만남이 없이 그와 사귐이 없는 호흡들은 하나님의 근원과 교통 하는 생기를 실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의 만남에서 보편적 전재가 있다면 첫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요 그 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 특별한 언약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확신하는 것보다 그들의 과거 경험을 지지했습니다. 이제 억압하던 애굽이 없다면 자유롭게 애굽의 좋은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공감했습니다. 이제 비전을 앞세워두고 한발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모호한 민족의 꿈보다는 개인의 현실과 요구를 채우려 함에 눈이 밝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불안한 개연성에 과거의 정통성을 부여함으로 미래를 점치고 있습니다.
마. 반정 ! 칼 끝에 서는 자, 칼자루를 쥐는 자.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구체적인 실행으로 옮깁니다. 과거 애굽의 경험들이 대안이 되었고 서로가 공감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론의 실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의 행보는 실수라고 하기에 무거우며, 중죄로 보기에는 의도치 않은 처세로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 주석들에는 아론의 죄를 중하게 인정하지만 봉기에 대한 두려움에서의 실수로 크게 확대하지 않고 후에 모세의 적극적인 변호로 아론의 실수임을 분명히 합니다. 모세의 변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아론의 언행은 정황들에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제사장으로 아론은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론의 제사장직이 애굽의 신정 정치적인 배경을 버리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일반 주석의 연구에는 아론이 몰려든 백성들에게 위협을 받았지만 금품을 헌신하게 하는 부담을 주어 그들의 행동을 자정 하게 하는 뜻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은 아론의 구체적 대처가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우상숭배의 시작은 아론이 제시한 일이 아니며 아론도 백성들의 동요에 당황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이었기에 애굽의 바로 앞에서도 함께 동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변화 앞에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도 시내산으로 오른 모세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모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 영민한 아론이라면 충분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인물입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모세의 부재로 인한 반역은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아론은 파라오와 대담할 만한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모세가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이었습니다.
반정에서 아론은 있다 없다 두 가지 모두를 선택했습니다. 아론은 친족 모세가 살아 있다는 전제를 우선합니다. 불같은 모세가 살아있다면 그 후에 이어 날 일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 결과는 아론이 어찌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민족이 분열되는 단초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믿고 싶은 자들은 결국 동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부터 모세를 원망하는 자들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모세가 어찌 되었음을 알지 못함이라" 그들은 어찌 되었는가? 하는 부정과 알지 못한다? 하는 두 가지 부정을 결론으로 이미 정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듣고자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론은 결정을 망설였지만 반정의 요구에서 답을 찾습니다. "신을 만들라" 만일 모세가 알았다면 사달이 날 일이겠지만 지금의 분열을 막을 묘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어느 정도 이 일에 동의하는지를 확인할 증표로 그들 귀중품의 기부로 의사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금으로 투표했고 드디어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아론은 거짓된 통합을 주도 함으로 당장에 분열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대국 애굽의 위정자 같이 뛰어난 선택과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적 책략과 산술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죄는 분리되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떠하든 거짓을 중용하지 아니하십니다. 세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결국에 모두 넘어지게 됩니다.
혹시 모세가 없다면 아론은 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계가 이드로의 조언으로 이제 만들어진 때였습니다. 실세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론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아론에게 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대세를 이을만한 공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공적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러운 백성의 요구 가운데서 아론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여론을 수렴하는 창구를 교묘히 자처했습니다. 백성들이 금을 모아오자 이 역사의 맨 앞에 자신의 뜻을 공표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명처럼 진중하게 일을 해결합니다. 최고의 보물을 모아 용광로를 구축하고 각도로 새길만큼 섬세하고 신중한 사적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일의 최선은 분명히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하며 애굽에서는 신을 만드는 자가 곧 파라오인 것입니다.
바. 애굽을 재건할 새 파라오를 만들라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애굽의 파라오라면 새 권력의 정통성은 신학을 쓰는 일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출애굽을 이룬 신은 애굽의 신을 능가한 신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 신화의 근본 신들 중에서 연유하고 당 시대 애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들의 조합이 필요합니다. 황소의 신은 우연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아론의 변명처럼 쇳물이 우연히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금형을 제작했고 각도로 새긴 섬세한 형태는 그들 신앙의 인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애굽의 황소 신은 범용적이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아피스, 하토르, 므네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중에서 정확히 무엇이라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세 황소의 신의 공통된 관심사가 제작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황금을 가저다 주는 번영과 풍요의 신이며, 사랑을 주관하는 다산의 신이고, 춤과 음악의 향락을 주관하는 축제의 신으로 이스라엘에게 진한 추억이 된 신앙들입니다. 더욱이 황소는 신의 현신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내세에서 인도하는 완벽한 신입니다. 또한 인간의 현신인 파라오를 젖먹이는 하토르에서 새롭고 강력한 파라오 모세를 역사에 기록하는 순간입니다. 현생 한 금 송아지는 애굽인으로서 당연한 결과물입니다.
대중의 숭배 소를 전제한 이 송아지는 재료나 기술의 부족으로 우연히 전개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피난 중 광야 한가운데서 용광로를 짓는 일은 큰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그 크기가 최소 송아지 크기나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금 송아지를 불살라 그 가루를 마시게 했다는 이후 기록으로도 유추할 만합니다. 목형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금을 도장하고 치장했습니다. 가장 값진 귀중품으로 각도로 새긴 창작물에 숭배할 만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함축했습니다. 각도로 새겼다는 것은 설계에서부터 완성까지 모든 것이 디자인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술적 가치도 애굽의 어떤 신보다 훌륭했을 것입니다.
애굽의 신학을 보고 자란 이스라엘은 그 관습대로 신을 요구했습니다. 장차 하토르처럼 강력하게 될 송아지가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으로 기대하게 합니다. 다산과 육성의 신, 풍요와 황금의 신, 축제와 기쁨의 신의 기대를 녹이고 녹여서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모세라는 강력한 황소가 죽어서 새로운 신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금 송아지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역사와 각각의 사건을 통해서 지금 함께 하심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지나간 무용담쯤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사로이 가벼이 여깁니다. 그의 존재를 자신들의 창작물로 지어내었습니다. 죄의 정의를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속죄란 그 어떤 무거운 죄도 예수의 보혈로서 씻기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쏟아낸 것입니다. 그들은 전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거꾸로 선, 악을 숭배하자 합니다. 그들 중에서 누구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이 부패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 글이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집필 중인 글입니다. 김관석의 이야기 성경주석.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When Aaron saw this, he built an altar in front of the calf and announced, "Tomorrow there will be a festival to the LORD."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So the next day the people rose early and sacrificed burnt offerings and presented fellowship offerings. Afterward they sat down to eat and drink and got up to indulge in revel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