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 현천교회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2Cor 6:2

고래 배속으로 들어가기 구약 성경 요나서를 보면 선지자 요나가 고래에게 삼켜지고도 살아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듯한 상상의 이야기가 자세한 구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에서 상어의 배 속에서...

요나 찾으러 왔단다



고래 배속으로 들어가기

구약 성경 요나서를 보면 선지자 요나가 고래에게 삼켜지고도 살아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듯한 상상의 이야기가 자세한 구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에서 상어의 배 속에서 재회한 피노키오와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대부분 알고 있는 유럽인들이지만 고래 배속의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는 상상이었나 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요나의 기행은 동화같은 상상처럼 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요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요나는 과연 그의 경험을 얼마나 성실하게 기록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고래에게 삼켜진 사람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 매우 많습니다. 검색을 인용해 보면 최근 2021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40년 잠수 경력의 가재잡이 어부가 혹등고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나온 뉴스가 있었습니다. 2019년 남아프리카 엘리자베스 항에서 한 전문 다이버가 대형 브라이드 고래 입으로 삼켜졌다가 나왔다고 보도 되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고래에게 삼켜진 사람을 잠시 후에 고래가 뱉어낸 사건들입니다. 그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고래에게 삼켜진 사람들의 기록들이 역사 속에 종종 발견됩니다.

월터 카이저와 FF 브루스의 성경 난제 주석에 의하면 앰브로즈 존 윌슨의 1927년 '프린스턴 신학 평론'에서  포클랜드 군도에서 향유 고래에게 먹혔던 선원의 사례를 언급했습니다. 고래는 포경선의 추격 끝에 잡혔고 갑판으로 인양해 배를 갈랐을 때 의식불명의 실종 선원이 살아 있었고 고래의 위산으로 피부가 얼룩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기사를 주목하자면 1891년 남아메리카 근해에서 포경 중인 배가 향유고래에 의해 일부 파선되고 선원이 고래 입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한참을 지나 작살을 맞은 고래가 죽어 떠오르자, 고래를 인양하여 해체하던 중에 내장에서 움직이는 선원을 구해냈습니다. 그는 고래의 체내에서 약 20시간 정도를 체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를 '큰 물고기'라고 했다는 것은 그 시대 그 지역에선 정확한 명칭은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고래라는 단어는 이후에 지명된 이름이고, 근대의 영어 성경 번역에만 고래로 되어 있습니다. 요나 때에 큰 물고기를 정확하게 고래라고 지명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 시대의 헬라어 '케토스'와 의미와 비슷하다지만 케토스는 커다랗고 기괴한 모든 경외적 존재를 뜻하는 어원이고, 요나의 '큰 물고기'는 상상속 신화적 대상이라기 보다 현실의 기사로서 실제 어류로 인지하고 있는 고래 부류를 가르킵니다.

큰 물고기(이하 고래)의 배속에서 과연 살 수 있었을까? 북극해에 서식하는 초대형 고래들은 목구멍이 좁아 사람을 삼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중해에 사는 동일 종목에 고래들 중에는 사람을 삼킬만한 종들이 분포해 있고 대형 상어류도 용의선상에 놓을 수 있습니다. 산소 부족과 위산으로 생존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론들도 많았지만 고래는 포유류로 직접 호흡하며 공기 유입은 폐 외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 뱃속에서 장시간 체류한 사건들을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말하는 것도 비과학적입니다. 물론 고래의 체내에서 보편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특별하지만, 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 특별한 개입을 우리의 이해를 위한 합리적 수순으로 끌어내리게 됩니다. 다만 이것이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이나 동화 같은 선정적 구성이 아니라 실제 있었을 사건의 기록이라는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말해주는 생생한 고래 뱃속 이야기


고래에 삼켜진 요나를 우리는 미술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것 같이 고래 배 안에 어느 공간 안에서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상태는 매우 끔찍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상황을 첫마디부터 고난이라는 말로 요나서 2장 2절에 기록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합니다. 스올 Sheol 은 히브리어에서 음부 陰府를 가리키는 지옥으로써 즉 지옥과 같이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바닷물은 계속 들이켜지고 위 속은 점막으로 끈적하고 습합니다. 갖가지 미생물들로 인한 역한 냄새로 숨도 쉴 수 없었으며 빛도 전혀 없는 흑암의 장소였습니다. 혹은 내장 기관들에 의해 꼼작 못하고 온몸이 눌려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1장 17절에 기록하고 있지만 그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했던 환란 중에 있는 욥의 비참한 상태와 같았습니다. 요나는 이 엄청난 사건에서 두려움을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진짜 요나의 스올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요나의 상태를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삼일간의 고립을 그리스도의 죽으신 예표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말씀의 선포로 핍박받고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흉포한 이방인들에게 전한 경고를 과연 저주로 받을지 복으로 들을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니느웨로에가서 저주를 전하는 것 자체도 두려웠는데 니느웨는 민족의 원수였고 부패한 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가 받을 핍박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도 싫었습니다. 고래에게 삼켜진 것은 요나와 함께 요나의 복잡한 두려움까지 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태풍을 만나고 고래에게 먹인 일들은 상상도 못 할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떳떳한 역경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 이제 삼켜질 죽음의 목구멍을 보여줍니다.




요나의 MBTI


하나님은 성경의 많은 의인들을 향하여 공통되게 수없이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요나의 이 부름의 때는 노년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적 소심함은 노년의 보수적 변화라기보다는 태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롬은 그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니느웨와의 잦은 전쟁에서 비롯된 전사자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한(왕상 17장) 당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한번 죽었다가 혼이 돌아온 자로서 철없이 세상을 즐겼을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내성적인 성품에 조신한 행보의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요나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적 주제는 '하나님의 부름에 도망간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부끄럽기까지 한 소극적인 요나를 부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비결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두려움에서 이끌어 내기 위한 시험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신중한 판단에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펴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말씀을 주시고 큰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서편으로 발을 돌이켜 욥바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파했어야 함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하여 가려고 니느웨가 있는 내륙으로 가지않고 정반대의 결정을 하고 바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려고 하면 마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도망갈 배를 마련해 줍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피하여 도망가는 사람의 길이 아주 순조롭습니다. 광야를 거치는 길은 험한 여정입니다만 배는 오르기만 해도 순풍에 돛 단듯이 나를 도와줍니다. 요나의 생각으로는 자신에 처사가 가장 지혜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니느웨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떠오르고 귀에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지자로서 요나는 양심의 부름을 아예 잊어버리고 싶어서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엄청난 중대한 일에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물러난 노인의 노련한 회피였습니다. 배가 덜 흔들리는 아늑하고 잠을 청하기 좋은 어두운 곳을 찾아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로서 평안히 잠들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에 요나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 잠이란 사명을 유기하기 좋은 죄의 도피처였습니다. 요나의 생각에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음은 확고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시편 139편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를 경유해 정확하게 뱃삯을 치렀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항구였습니다. 다시스는 서쪽 땅끝에서 가장 문명화된 항구 도시였습니다. 요나가 팔레스타인에서 서쪽 땅끝 이베리아반도까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고자 했던 결단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잃었습니다. 게다가 천하고 더러운 이방 앗수르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현 세태를 의분하였습니다. 선지자란 천직 마저도 포기할 만큼 그의 감정은 소용돌이치며 휩쓸려 갑니다. 이제 그것이 요나의 정의였습니다.




햐 ~ 도망가는 얘는 처음이야 ㅠ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요나의 배가 처음에는 순조롭게 가는 것 같더니 얼마 가지 못해서 대풍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태풍에 배가 파선할 지경이었습니다. 모든 선원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에 실었던 모든 물건을 바다에 던집니다. 물건을 배편에 실어다 파는 장사꾼들에게는 이 물건들은 생계를 지켜줄 보물들입니다. 스페인은 모든 금속이 풍부한 땅으로 다시스는 제련 산업의 도시였습니다. 다시스란 정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금속을 싣는 다시스의 배는 튼튼하며 적재력이 우수합니다. 쇳덩이들을 싣고 작은 배를 가지고는 바다에 나갈 수 없습니다. 금속을 무역하고 동양의 향신료와 갖가지 귀한 물품들을 험한 산지 고향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 물품들을 바꾸려고 오래도록 광산에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튼튼한 배에서 이 귀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것은 이제 죽을 처지에 이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건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런데 파도는 멈출 줄을 모르며 배는 더 위태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해 자기가 믿는 신들을 부르며 야단이 났습니다. 배 밑창에 쌓여있던 물건까지 모조리 꺼내다가 잠자던 요나를 발견합니다. 선장은 말하기를 "이 환란의 때에 숨어 자는 자여 너는 어찌 된 일이냐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너는 너의 하나님을 부르라 혹 네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어 우리를 망하지 않게 기도하라"며 야단했습니다. 요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자기 때문인 것을 내심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요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주저합니다. 이것은 깨어있는 사명자가 아닙니다. 한낱 장사치들도 운명 앞에서 자기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죄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자기 죄에 관해서 입을 꾹 닫고 모르는 척하는 거짓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상황이 언제쯤 지나갈까? 노련한 요나는 그런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죄가 주홍같이 붉을 때


여러분 우리의 죄로 인한 환란이 언젠가 지나가리라 생각하십니까? 죄는 반듯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혹 지나 갔나? 생각하십니까? 죄가 기록되면 그것을 지울 길은 세상에 없습니다. 혹 속죄제로 지울 수 있습니까? 양의 피로서 지울 수 있습니까? 피로서 속죄함을 얻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작은 죄는 적은 피로 지워집니까? 큰 죄는 얼마나 더 많은 피로 지워야 합니까? 죄를 피로 씻는다는 말씀은 곧 죄는 생명으로 대가를 치른다는 말입니다. 이삭의 목숨을 대신하여 양을 예비하신 것은 이삭과 양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대신하였다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계약의 표였습니다. 피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 한 것은 죄는 나의 생명 즉 그 존재를 영원히 지워야만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죄를 씻을 길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흘려 대속하는 '피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즉 죄란 하나님의 피 즉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계약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이든 숨길 수 없고 속일 수 없으며 그냥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죄가 정령 너를 찾아가리라 하셨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당장에 변화가 없다고 그것이 없어졌거나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피 심리에서 오는 자기 최면입니다. 현실은 그렇게 주저할 때가 아니라 일을 바로잡기 위한 반성이 있다면 이제는 그 늪에서 나와서 삶을 살려는 의지를 내야하는 것입니다. 범한 거짓들이 씻지 못할 죄로서 낙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경고와 그가 멸시하는 이방 사람들의 권면을 받고도 그저 자신을 숨기려고만 했습니다. 여러분 숨기고 감추는 것들은 참과 거짓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또한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은 참과 거짓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모두가 거짓의 아비 사탄의 다른 표정입니다. 아직도 죄를 숨기는 것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요나가 여기서 자복하고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바다는 잔잔해졌지 않았겠습니까? 요나가 앞으로 더 당할 일을 알았다면, 지금 죄를 속임으로 자신이 커다란 물고기의 환란 속에 거할 죽음의 문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가 정령 요나를 쫓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기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죄도 역시 나를 쫓습니다. 이 죄는 용서의 기회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죄는 지울 수 없는 낙을 남깁니다.


이 낙은 우리의 얼굴과 양심에 파고들어 씻을 수 없는 절망이 되게 합니다. 이 어두운 흑암 속에서 결단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실 같은 빛 일지라도 그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처로 썩어가는 팔과 다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어디서 고름이 터지고 구더기가 득실대는지 빛이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이라 원망 가득했지만 더럽고 추한 내 모습이 더 절망적이란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디를 씻고 깨끗게 할지를 알게 되며 더욱이 내 죄가 용서받을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는 것은 마귀의 고삐에 끝없이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고 합니다만 그앞이 바로 사망의 길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아니여도 내 판단은 나의 중심


하나님의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세상을 견주어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그대로 달려갈 수는 없었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빗댄 것이라면 하나님이 관여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부름에 세상적 판단으로 민족과 혈연의 정의를 걸고 만용을 부렸습니다. 내 판단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저울질했습니다. 우리의 안는다는 것은 모든 판단의 기준됩니다. 그러나 이 판단들이 순종을 방해합니다. 본질적인 순종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습니다. 설명이나 이해란 이타적인 것에 필요합니다. 머리가 손에 전하는 지시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부름은 주인이 종에게 하는 공생적 명령으로 일체의 기능적 관계입니다. 주님은 내 삶의 주체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그분의 부름에 답하는 것은 한 몸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누가 판단하게끔 합니까? 무엇을 근거로 다르다고 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귀는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리하여 주장합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독립하여 살겠다고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을 헐값에 팔아도 아깝지 않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가진 티끌만 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해 어리석은 결정으로 끌어갑니다. 여러분이 이해하려는 순간에, 판단하려는 찰나에 마귀에 뀜에 넘어갑니다. 베스트 셀러 서적 중에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란 책이 있습니다. 깊은 의미를 담은 한 문장의 책 이름만으로도 사색에 빠집니다. 그런데 한때 이 책이 이단의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책 제목의 질문은 삶 안에 있는 일상의 선택인 듯합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추하게 하는 질문의 의도는 알겠지만, 우리에게는 신적인 정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가 됩니다. 이 책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분별해야 할 곳에서 판단을 고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배움의 정도에 따라서 역량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피교육자의 판단이나 노력이 아니라 이미 귀속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 하는 판단이 아니라 이럴 때 성령의 역사가 우선합니다.


요나는 "이럴 때"에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런 어리석은 고집 때문입니다. 내 죄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죄를 조금은 이해해 달라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그러면 바른 회개를 볼 수 없습니다. 죄가 들통나도 이 죄에 대한 변명이 계속되는 것은 죄를 회개할 마음이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아십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죄를 숨기려 했습니다. 숨긴다는 것은 실수이기 보다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거짓을 효과적으로 포장하는 가장 악한 전략적인 전술입니다. 거짓은 하나님의 법, 참과 다릅니다. 요나는 이럴 때 모든 거짓을 내려놓고 진실한 회개가 돼야 했었습니다.




숨기는 자의 피곤한 눈


숨긴다고 거짓이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요나의 바다에서 뱃사람 모두가 기도 했지만, 풍랑은 잦아지지 않았습니다. 뱃사람들은 다시 의논하기를 우리 중의 이 죄인을 골라내어 진노의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이 재앙의 근원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나왔습니다. 드디어 죄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노련한 요나는 즉시 회개하지 않습니다. 정말 답답하리만큼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다그쳤습니다. 너의 무슨 연고로 재앙이 우리에게 임했는가를 고하라 합니다. 염치없어 입이 무거운 요나에게 사람들은 조목조목 물어보았습니다. 질문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요나의 진술이 단답형으로 성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실의 조각들에도 이 사람들이 그 사정을 다 듣고는 심히 무서워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게 진실이 드러났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멈추지 않습니다. 바다가 더 흉용해지자 무리가 요나에게 해법을 요구했습니다. 집요하고 간절한 그들의 질문에서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자들이 보이기 시작했을까? 요나는 사면초가의 현실에서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고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 결단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신만의 이기적인 대처였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그의 죄가 없어졌을까? 그가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나 하나 죽으면 다 되겠지하는 어리석은 생각들도 역시 사단의 선택지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결단에 이를 때까지 이용합니다. 우리가 심판날 생명책 앞에 서면 우리의 죄를 지금 보는 것 같이 낱낱이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 생명이 다할 날까지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의 시간이 곧 우리 집행 유예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는 것을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으로 죗값을 치르겠다 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 맘대로 회개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바른 회개, 참 선악의 길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나가 진정으로 이 거짓된 선악에 대하여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기 전까지 그는 사력을 다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심판이 곧 요나의 심판이 되었음을 알게 하시기 원했습니다. 거짓된 선악에 이끌려 참 회개의 길을 벗어났음을 호통하셨지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제멋대로 몸을 던졌습니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끝까지 요나를 살리려 애를 썼습니다. 노를 저어 육지에 그를 놓고자 했으나 바다는 더 험악해졌습니다. 마침내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 뛰던 바다가 그쳤습니다. 그 이방인들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서원하기를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죽었는데 이제 삶을 알 것 같아


요나는 큰 물고기에 삼켜지기 전, 대작하는 큰 물의 위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요행은 삶의 경험과 수단으로 넘겨왔지만, 물에 던져진 즉시 그 죽음이 당장에 목을 조였습니다. "큰물이 나를 두르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첬나이다." 요나 2장 3절. 거친 파도가 거세게 그의 머리를 수없이 내려쳤습니다. 여기 주의 파도란 각각의 인생의 바다에서 밀려오는 심판의 섭리를 말합니다. 즉 그는 이러한 처지에 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분의 의지들로 밀려왔고 도피의 과정 모든 곳에 섭리 된 여호와의 뜻이 계속 자신에게 불어 닥쳤다고 느꼈습니다. 


그 끝에서서 이제 한 호흡만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간절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보겠다 합니다. 자신이 소망마저도 끊어진 심해 속에서 물결에 흔들리는 물풀처럼 버려졌고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불순종이 땅과 바다를 분리하는 빗장처럼 펼쳐졌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제물로 던져지고 넓은 바다에 흔한 물풀처럼 버려지고 이제는 깊은 심해 속에 잊혀 버리는 요나의 죽음과 심판에서 다시 주의 성전을 보겠다는 한마디에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으로 자신을 구원하신 여호와께 드디어 감격과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다시 얻은 주의 성전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주실 수 없는 지성소 였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심야를 회개로 채워진 감격과 찬양은 징벌과 정죄로 인한 고난의 물고기 뱃속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한 여호와의 품이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전체의 기도가 대부분 시편의 인용이라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삶 전체가 여호와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여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시편의 감동들이 진짜 찬양이 된 것은 그 곳에서 놀라운 여호와의 임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큰 물고기를 이미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명하여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완전한 운행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역경을 함께 하시고 다시 요나를 부르십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지라. 마치 부활하신 예수께서 3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신 하나님의 깊은 성품을 만납니다. 요나는 이제야 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삼일 길이나 되는 거대한 성으로 바벨론 보다도 현저히 컸던 세계를 호령하는 메타였습니다. 요나가 성안으로 하룻길을 가서 즉 도시의 중앙에 서서 외치기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가 지중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사역지에 서니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또 함께합니다. 니느웨의 백성들과 왕과 신하들이 일제히 상복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며 반성의 조서를 법으로 내려 온 성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 한복판에 서서 성령으로 충만한 요나의 입에서 불같이 터지는 메시지에 수십만 명이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인구는 학자들이 연구한 면적당 인구수로 28만 명에서 32만 명가량이나 됩니다. 요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 중심에서 외칩니다. 천둥같이 쩌렁쩌렁한 그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요나의 강하고 담대한 자태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거기에 고래 배 속에서 사흘간 지냈던 요나의 피부는 온통 새하얗게 탈색되었을 것입니다. 이 순백의 신비로운 선지자가 사자후처럼 폭발하는 목소리로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찌르매 니느웨는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행보는 늘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만 요나의 니느웨 사역은 하나님의 예견하신 심판보다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와~ 세게 맞은 뒤통수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에서 부르신 첫 번째 말씀과 달랐습니다. 그 말씀은 니느웨의 악독을 경고하고 재앙으로 정죄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이 바뀌었을까? 문자 그대로 뜻을 돌리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예정은 바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변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판이 목적이었다면 요나를 파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이나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구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일축하셨습니다. 구원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모두 예정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영혼을 더 귀하고 소중히 합니다.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악독한 니느웨가 회개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내심 니느웨의 앞날을 예견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원수, 민족의 원수 니느웨가 하나님의 손에 쓰러질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보름 남았군, 그래 닷새만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야" 40일을 손꼽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성 동편 언덕에 초막을 짓고 성이 망하는 꼴을 두 눈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요나의 초막은 도단성에서 아람 군대를 홀로 대적했던 엘리사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분위기가 예루살렘보다도 신실해집니다. 성 전체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부흥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 회개는 성령의 감동하신 사역이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꿀 요나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과의 동역을 실망했습니다. 다 늙은 노 선지자가 죽을 고생을 몇 번이나 지내고 다시 사명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뜻을 거두셨다니 요나의 마음이 요동했습니다. 미움이 생기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기도했습니다.


니느웨는 창세기 10장 6절에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이 건설했습니다. 성경은 니므롯을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소개합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으로 전해지며 처음 바벨론 지역을 점령한 왕으로서 앗수르의 시조입니다. 니느웨는 바벨론 점령지에 세운 앗수르의 수도로 오랜 고대 도시였지만 BC 600년경 신 바벨론에 의해 함락됩니다. 4개의 내성으로 건설된 크고 튼튼한 성으로 건설되었지만, 함락 후 홍수와 자연재해 등으로 성의 자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집니다. 요나의 사역 후에 약 200년경에 처음 경고 그대로 니느웨 성이 무너져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니느웨의 회개가 지속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세대는 뜻을 돌이켜 유예했지만, 다음 세대는 다시 악이 가득했음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증들에 의하면 니느웨에 요나의 선포 이전에 역병과 지진등의 여진적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진적 재앙들 끝에 요나의 경고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결국에 다시 죄로 돌이켰던 니느웨는 무너졌습니다. 그 흉포한자들의 패망을 티그리스강 유역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선포하라 하신 그대로를 요나의 시간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 동편 언덕에 지은 초막은 뜨거운 광야의 열기를 피하기에 부족했습니다. 노 선지자 요나는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요나를 위로하기 위해 박넝쿨을 초막위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 그늘로 인해 요나가 기뻐하였으나 이튿날 벌레로 넝쿨 줄기를 씹게 하니 그늘을 주던 잎이 곧 시들어 버렸습니다. 뜨거운 해가 요나의 주름진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사명의 회의와 머리 둘 곳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차라리 죽는 게 좋겠다고 분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네가 잠시 즐겼던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자신이 이제 성내다가 죽는다 해도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대화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룻밤에 나고 시들어 버린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7세 미만의 어린아이가 12만 명이나 되는 이곳을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한가? 그 성냄에 진원을 물으셨습니다. 다시 돌아간 주님의 놀라웠던 성소에서 시들어 버린 박 넝쿨 이파리가 되었습니다.




요나서의 부끄러운 진실


앗수르는 당 시대에 거대한 나라였습니다. 지존 至尊의 고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격하는 죄 때문입니다. 다시스란 의미 역시 정련의 세계 즉 칼을 만드는 세상의 다스림을 의지하여 나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도전합니다. 유대가 오히려 스스로 회개하지 않으면서 회개하는 이방 민족을 시기하고 저주하는 완고한 교만에 하나님은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인의 유대인만을 위한 선민의식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타난 보자기의 음식처럼 사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 고질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오히려 더럽다고 치부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불손한 자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요나서는 요나의 길고 피로한 여정에 나타난 기묘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목에서 큰 물고기가 요나보다 중요하겠습니까? 그 속의 요나는 바로 그날 이스라엘에서 얼굴을 돌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훗날에 하나님의 흉배를 가슴에 차고 머리를 풀고 웃옷을 찢으며 "참람하도다" 소리치며 이르기를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나님의 법을 제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이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요나서는 신화 같은 모험이나 요나의 위대함을 품은 위인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나의 실수와 편견이 가득하며 그 배후에 숨어있는 인간의 죄가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자서전이나 역사를 이런 부끄러운 치부로 채우겠습니까? 요나서 4장 11절 마지막 말씀은 어떤 설명이나 마무리가 없이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 후에 요나는 성경의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요나의 부르심이나 큰 물고기의 부르심이나 요나서의 주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니느웨를 통해 이스라엘에 주시는 경고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오히려 앗수르 침략을 당위적으로 보완될 사건입니다. 요나서가 선지서에 포함된 것은 민족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호흡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선지서 중에 예언서가 아닌 예언자의 실무일지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태로부터 유전적으로 태생으로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그의 부르심 그와의 영적 접촉 모두가 기적처럼 놀랍고 기이하며 내 마음을 불처럼 뜨겁게 하며 우리 인생을 휘몰아치는 태풍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반드시 주님의 평안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뜨겁고 차가운 빗장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오늘의 현실과 하나님의 비전을 선 긋고는 진실이 아닌 선악을 두고 생명을 소비합니다. 요나서는 예언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기입니다.



(2023.0611.설교초고) (2023.0615.주석초고) (2023.0627.수정중) 

본 글은 이야기 성경 주석으로 집필 중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