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천동 40-16 을 경유했던 통행로 사용을 중단합니다. 해당 번지의 통행 제한 요청을 수용하기로 공회 결의 했고 해당 토지 방향 교회 진입구도 폐쇄합니다. 폐쇄 이유 1. 2024년 8월 24일의 2건의 집단 폭행 사건. 2. 지속적인 폭행과 시비...
[긴급] 교회 진입로 폐쇄 안내 (우회안내)
믿음이 택한 삶. 로마서 4 : 18 - 25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서 섭리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믿음이 택한 삶
믿음이 택한 삶.
로마서 4 : 18 - 25
어서와~ 쿰란 동굴로 ;; ** 예쁜성심> 쿰란서고 에서 게시합니다. ** 목차에 맞춰 함께 읽고 더 깊은 주석과 주해를 보완해 주는 독서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첫번째 책. 팀 켈러의 기도 출간일 : 2015.05.19 출판 : 두란노 페...
쿰란서고 - 신학자가 함께 읽는 신앙서적
어서와~ 쿰란 동굴로 ;;
목차에 맞춰 함께 읽고 더 깊은 주석과 주해를 보완해 주는 독서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첫번째 책. 팀 켈러의 기도
출간일 : 2015.05.19
출판 : 두란노
페이지 : 408p / 150*210(mm)
원서명 : Prayer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제임스 티소. 작)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의 한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 시점에서 본 용서, 구원의 최후 변론. (제임스 티소. 작) |
"우리는 용서에 관하여 과거 시제를 배경에 둔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미래 시제에도 있다."
THE 490th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법은 490번의 계산적인 용서가 아닌 이상적 상징이다. 이는 과거에 쌓여진 사건에서 큰 용인을 결단하게 하는 반교육적 예시이다. 용서가 필요할 사건이란 병적 피해 망상이 아닌이상 일반적으로 다수의 사건을 전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사소한 사건들은 대부분 시간 적응을 통해 무시되거나 잊혀지는 심리로 귀결된다. 이전에 경험했던 피해들은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거나 새로운 더 큰 사건으로 대부분 대치 된다. 현실은 490번의 용서를 해야 함 보다 490번의 피해를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아시는 주님은 490번의 과거를 잘 마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만날 용서에 대해 부탁하는 질의 응답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심리적 속성을 꿰뚫고 계신다. 몇 번을 용서함이 의인의 아량일까?하는 질문에 앞으로 490번이나 이럴진데 이미 지난 일에 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씻는 건 어떠하냐는 식의 예수님만의 특별한 귀납적 화법이다. 그러면서 미래에 있을 용서까지도 생각해 볼 사고의 여지를 주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정체 된 것이 아니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 오늘도 항상 유지 되어야 하는 지속적 삶이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미래의 용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본성에 관한 일에 결과이므로 준비하거나 예상할 수도 없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반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군가를 계속 용서해야 할 사안이 예상된다면 지금 한번의 용서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 저 짓을 보고 있다면 용서에 관하여 이것이 완전한 방법일까 회의하게 된다. 어쩌면 익숙해진 용서는 용서가 아닐 수 있다. 용서란 방법이 요연한 사건이거나 시험할만한 스스로의 잣대를 지나 매우 충격적일 수 있는 일에 붙여야 할 거대한 결단일 수 있다. 어찌보면 지속적인 용서는 삶에 있어서 가변적 한계이다.
490번의 이상적 수의 대입이 과도하게 강조한 것이기 보다 우리가 할수록 없음을 이미 아시지만, 도달할 수 없는 용서의 수긍을 주문하신다. 어떤 용서가 당연하지 않았다 해서 죄책감에 까지 내려가거나 포기하지는 말아라 오늘의 용서는 490번 중에 대입 중인 것이다. 단지 마음에 거스르는 것을 두어서 이러한 시험에 대처하는 면역을 키우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용서 받을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늘 그것을 달고 산다. 그러나 이처럼 용서에 대해 고심하는 자라면 그가 받을 용서 받음이 어쩌다가 한번의 사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함 받는 조건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한번의 용서나 많은 용서나 마음 의 근본 뿌리에서의 역사이다. 요셉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그 한번의 사함이 생명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많은 용서를 감내하게 된다.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함께함을 믿는다.
그분을 대면할 때 최후의 변론은 용서일 것이다. 용서는 용서의 대상들에 문제가 아니라 용서 하는자의 의식에 가치이다. 어차피 쭉정이는 다 불사를 때 전혀 다른 차이를 증명하게 된다. 이 차이란 심령의 근본적 차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조건이나 기회, 천국의 정치적 기반이나 인간의 관계 개선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집에 거하는 자에게 용서는 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자인가? 이다. 용서의 결과가 품을 목적이 아니라 용서할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용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 거룩함에 나아감에 차이가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의 뜻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용서를 몇 번 했느냐로 가늠하지 않는다. 다만 저가 알곡 인지를 분별한다. 그 선함의 dna를 기뻐하신다. 그것으로 더 크게 갖추어진 한 인격이 되는 것은 다 차이가 있지만 장남과 차남의 차이일 뿐이다. 용서는 선함을 시험 받는 또는 연단하는 주요한 과정이다. 예수님의 490번에는 쉽게 이해할 예시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물었던 그날 질문을 두고두고 되물을 예언적 계시로 답하셨다.
오늘 제자들의 의구심에도 그 복잡한 마음을 시원하게 씻을 용서가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 한다. 240423.
그림.
What Our Saviour Saw from the Cross. (1886-1894)
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 French
2024년 4월 23일 하늘색 언덕 현천교회에서 김관석 拜上.
교회는 전 교인의 전 생애를 위한 평생 성경 학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담 없는 출석을 위한 템플 체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공 예배의 말씀은 성경 강해이며 모든 사경회의 주제가 성경 연구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대의 회당처럼 교육하며 토론하는 성...
성경에 기초한 확실한 믿음
교회는 전 교인의 전 생애를 위한 평생 성경 학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담 없는 출석을 위한 템플 체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공 예배의 말씀은 성경 강해이며 모든 사경회의 주제가 성경 연구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대의 회당처럼 교육하며 토론하는 성경 학교입니다.
성경학교의 자전적 목적
목회, 목양이란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목양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 출석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매일 먹어야 삽니다. 우리가 받은 일꾼의 일은 성직으로 부르는 반포자 Preacher 도 아니며 대사 Minister 도 아니라 Bible Teacher 교사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도 복음 전하는 자라고 아울러 말씀합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의 주된 핵심은 교육입니다. 복음을 받을 자나 이미 받은 자에게도 필요한 교육적 구분에 필요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뜨거웠던 열정을 회고하고 정립한 권면을 디모데 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세 가지 직책 모두가 가르치는 하나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고 쓰기 위한 교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일 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절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날카로운 검같이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일 년에 한번 전체를 정독했다는 일이 주요가 아니라 한 말씀 일지라도 양심을 흔들고 가치관이 깨지는 진리로 일 년을 사는 것입니다. 도전이었다가 묵상이 되고 진정한 회개를 알게 되어 결국 거듭난 생명으로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동행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제각각 판단하는 오늘의 적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그날에 사실과 역사하신 그분의 뜻이 오늘도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적 칼럼 같은 개개인의 해석보다는 객관적인 근거를 먼저 살피는 진중한 성경 공부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에 첫발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단 시일에 또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성경 연구에 매진한 성경 학자들도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 할 정도입니다.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보편적 도우심은 우리를 도우시는 교육입니다. 성령은 성경 교육의 기초를 인도하며 도우십니다.
성령의 첫째 교육은 첫째 진리로 인도하시고 지혜를 보게 하시며 그 속에 나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의 둘째 교육은 우리를 뜨겁게 감동케 하시며 이 충만함 가운데서 내가 철저하게 깨어지며 세상의 당연한 가치가 엎어지는 잊을 수없는 삶의 체험을 보이십니다. 내 인생이 예루살렘 성문에서 종려나무 가지처럼 흔들리기도 하며 갈대와 같이 꺽어지는 아골 골짜기에서도 동일한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 교육은 그의 충만함으로 흐르게 하십니다. 나로 행동케 하십니다. 첫째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가르치십니다. 둘째는 나와 성령의 인격이 동화되어 강력한 역사를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는 나의 도전과 간구를 지원하십니다. 이 모두가 보혜사 성령의 완전한 세우심입니다.
성경학교의 커리큘럼
성경의 기록은 기원전 3600년 경 모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역사로 비교하면 환웅시대 이전의 고대 역사가 배경입니다. 모든 인류의 기록 중에서 이처럼 장대하고 상세한 고대 기록은 찾아보기도 힘들뿐더러 전무한 역사입니다. 이 진귀한 성경은 고고학적 학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각각의 시대에서 즉 모세의 기록부터 사도 요한의 기록까지 약 4천 년의 시간을 지내면서도 그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 년 동안도 계속 함께하는 아직도 진행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단순히 내용을 읽고 아는 것에서 지나 오랜 역사의 동질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쉽고 간단하리만큼 명확하지만 그 풀이와 경험은 닿는 이마다 다 다를 만큼 넓고, 진중함이 깊고, 새로운 창조를 만나듯이 심오합니다. 이 명확하고 단순한 선포를 찬양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고백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만남과 배움이 나에 평생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성경 학교는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마가의 성경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자랑은 문답과 대화로 교육하셨던 예수님의 성경 학교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한 개인의 평생 성경 공부를 위해 질의와 답변과 상담, 이 개인적인 교육 과정을 준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기 평생 성경학교에서 국어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외국어는 각각의 성경을 연구한 주석입니다. 수학은 신학자들의 신학론입니다. 우리의 국사는 2000년 전 세계 교회의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배움의 제시를 준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장성하는 성도에게 평생 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예수님 앞에선 누구도 평신도나 교역자로 불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평신도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평신도로 당신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란 의미는 가르침 앞으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전까지가 평신도입니다. 이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쉽게 전하는 메신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쉽고 간결하게 알 수 있지만 예수님 말씀의 배경인 성경을 더 아는 것은 더 명확하고 정확한 풀이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풀이가 뒤따릅니다. 제자들의 교육 기간이 3년 최종 대학원 과정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3년은 공생에 기간이지 제자들의 교육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때가 이르매 순식간에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간의 많은 가르침이 깨어난 것입니다.
성경학교의 새로운 몽학선생
사역자란 이 가르침을 친절하고 쉽게 베풀어야 합니다. 권위를 내세우고 우월한 위치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를 교사를 넘어 인생의 멘토로 삼습니다. 성경 교사란 개개인에게 맞춘 평생의 벗이 되는 일입니다. 교육하고 권면하며 때로는 질책하는 허물없는 벗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함에 권위를 말한 것은 주의 일을 함에 그가 연소함으로 업신여기는 마귀의 시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30세에 시작하셨습니다. "청년예수"란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 아들의 나이는 이 우주의 나이입니다. 연소함에 업신여기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마귀의 궤계를 알았습니다. 정작 바울 자신은 모든 가르침에서 친구와 같은 친밀함으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범되게 행함을 원했습니다. 권위를 억지로 만들지 말고 말씀 속에서 섬김의 위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선지적 예언과 가르침의 은사와 섬김의 종으로서 또 한 사람의 랍비를 세상에 보내는 사명자가 교사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기본은 한결같은 벗이며 겸손한 충고입니다. 출석 교회를 고르는 일은 헛되고 무의미합니다. 성경 말씀에 진심인 목자를 전심으로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대량으로 크리스찬들을 양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당신의 소중한 삶을 위한 진실한 개인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인 것은 이스라엘 지파를 예표하는 상징의 수가 아닙니다. 12명의 개인 교습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능력이 있으시지만 12명의 자유로운 영혼들의 방황을 일일이 잡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속 마음까지도 보셨으며 그들의 의심까지도 물어봐 주셨습니다. 12명을 이렇게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공동체란 대규모 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의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공동체의 소망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교육은 오늘의 학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목자란 내가 얍복강가에서 씨름했던 천사와 같은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두고 함께 씨름 할 선생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목자라면 당신의 인생에 무엇이 유익이겠습니까? 참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친구 같은 선생을 만남은 은혜입니다. 평생 함께 할 이 같은 스승이라면 성령의 예정하신 운명입니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아합왕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외로운 옐리야였지만 그는 기도 중에서 의로운 7천의 교회를 찾았듯이 우리를 위하여 반듯이 예비하셨으리라 믿기를 바랍니다. 계속하여 스승을 찾고 당신의 신앙을 질문하기를 바랍니다. 그 간구를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노션 개발진 캐릭터로 응용해서 만든 필자. d-.,<b (3/21.2024) |
고래 배속으로 들어가기 구약 성경 요나서를 보면 선지자 요나가 고래에게 삼켜지고도 살아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듯한 상상의 이야기가 자세한 구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에서 상어의 배 속에서...
요나 찾으러 왔단다
고래 배속으로 들어가기
요나가 말해주는 생생한 고래 뱃속 이야기
고래에 삼켜진 요나를 우리는 미술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것 같이 고래 배 안에 어느 공간 안에서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상태는 매우 끔찍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상황을 첫마디부터 고난이라는 말로 요나서 2장 2절에 기록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합니다. 스올 Sheol 은 히브리어에서 음부 陰府를 가리키는 지옥으로써 즉 지옥과 같이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바닷물은 계속 들이켜지고 위 속은 점막으로 끈적하고 습합니다. 갖가지 미생물들로 인한 역한 냄새로 숨도 쉴 수 없었으며 빛도 전혀 없는 흑암의 장소였습니다. 혹은 내장 기관들에 의해 꼼작 못하고 온몸이 눌려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1장 17절에 기록하고 있지만 그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했던 환란 중에 있는 욥의 비참한 상태와 같았습니다. 요나는 이 엄청난 사건에서 두려움을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진짜 요나의 스올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요나의 상태를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삼일간의 고립을 그리스도의 죽으신 예표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말씀의 선포로 핍박받고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흉포한 이방인들에게 전한 경고를 과연 저주로 받을지 복으로 들을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니느웨로에가서 저주를 전하는 것 자체도 두려웠는데 니느웨는 민족의 원수였고 부패한 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가 받을 핍박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도 싫었습니다. 고래에게 삼켜진 것은 요나와 함께 요나의 복잡한 두려움까지 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태풍을 만나고 고래에게 먹인 일들은 상상도 못 할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떳떳한 역경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 이제 삼켜질 죽음의 목구멍을 보여줍니다.
요나의 MBTI
하나님은 성경의 많은 의인들을 향하여 공통되게 수없이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요나의 이 부름의 때는 노년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적 소심함은 노년의 보수적 변화라기보다는 태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롬은 그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니느웨와의 잦은 전쟁에서 비롯된 전사자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한(왕상 17장) 당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한번 죽었다가 혼이 돌아온 자로서 철없이 세상을 즐겼을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내성적인 성품에 조신한 행보의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요나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적 주제는 '하나님의 부름에 도망간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부끄럽기까지 한 소극적인 요나를 부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비결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두려움에서 이끌어 내기 위한 시험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신중한 판단에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펴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말씀을 주시고 큰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서편으로 발을 돌이켜 욥바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파했어야 함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하여 가려고 니느웨가 있는 내륙으로 가지않고 정반대의 결정을 하고 바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려고 하면 마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도망갈 배를 마련해 줍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피하여 도망가는 사람의 길이 아주 순조롭습니다. 광야를 거치는 길은 험한 여정입니다만 배는 오르기만 해도 순풍에 돛 단듯이 나를 도와줍니다. 요나의 생각으로는 자신에 처사가 가장 지혜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니느웨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떠오르고 귀에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지자로서 요나는 양심의 부름을 아예 잊어버리고 싶어서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엄청난 중대한 일에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물러난 노인의 노련한 회피였습니다. 배가 덜 흔들리는 아늑하고 잠을 청하기 좋은 어두운 곳을 찾아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로서 평안히 잠들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에 요나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 잠이란 사명을 유기하기 좋은 죄의 도피처였습니다. 요나의 생각에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음은 확고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시편 139편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를 경유해 정확하게 뱃삯을 치렀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항구였습니다. 다시스는 서쪽 땅끝에서 가장 문명화된 항구 도시였습니다. 요나가 팔레스타인에서 서쪽 땅끝 이베리아반도까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고자 했던 결단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잃었습니다. 게다가 천하고 더러운 이방 앗수르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현 세태를 의분하였습니다. 선지자란 천직 마저도 포기할 만큼 그의 감정은 소용돌이치며 휩쓸려 갑니다. 이제 그것이 요나의 정의였습니다.
햐 ~ 도망가는 얘는 처음이야 ㅠ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요나의 배가 처음에는 순조롭게 가는 것 같더니 얼마 가지 못해서 대풍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태풍에 배가 파선할 지경이었습니다. 모든 선원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에 실었던 모든 물건을 바다에 던집니다. 물건을 배편에 실어다 파는 장사꾼들에게는 이 물건들은 생계를 지켜줄 보물들입니다. 스페인은 모든 금속이 풍부한 땅으로 다시스는 제련 산업의 도시였습니다. 다시스란 정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금속을 싣는 다시스의 배는 튼튼하며 적재력이 우수합니다. 쇳덩이들을 싣고 작은 배를 가지고는 바다에 나갈 수 없습니다. 금속을 무역하고 동양의 향신료와 갖가지 귀한 물품들을 험한 산지 고향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 물품들을 바꾸려고 오래도록 광산에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튼튼한 배에서 이 귀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것은 이제 죽을 처지에 이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건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런데 파도는 멈출 줄을 모르며 배는 더 위태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해 자기가 믿는 신들을 부르며 야단이 났습니다. 배 밑창에 쌓여있던 물건까지 모조리 꺼내다가 잠자던 요나를 발견합니다. 선장은 말하기를 "이 환란의 때에 숨어 자는 자여 너는 어찌 된 일이냐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너는 너의 하나님을 부르라 혹 네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어 우리를 망하지 않게 기도하라"며 야단했습니다. 요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자기 때문인 것을 내심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요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주저합니다. 이것은 깨어있는 사명자가 아닙니다. 한낱 장사치들도 운명 앞에서 자기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죄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자기 죄에 관해서 입을 꾹 닫고 모르는 척하는 거짓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상황이 언제쯤 지나갈까? 노련한 요나는 그런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죄가 주홍같이 붉을 때
여러분 우리의 죄로 인한 환란이 언젠가 지나가리라 생각하십니까? 죄는 반듯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혹 지나 갔나? 생각하십니까? 죄가 기록되면 그것을 지울 길은 세상에 없습니다. 혹 속죄제로 지울 수 있습니까? 양의 피로서 지울 수 있습니까? 피로서 속죄함을 얻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작은 죄는 적은 피로 지워집니까? 큰 죄는 얼마나 더 많은 피로 지워야 합니까? 죄를 피로 씻는다는 말씀은 곧 죄는 생명으로 대가를 치른다는 말입니다. 이삭의 목숨을 대신하여 양을 예비하신 것은 이삭과 양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대신하였다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계약의 표였습니다. 피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 한 것은 죄는 나의 생명 즉 그 존재를 영원히 지워야만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죄를 씻을 길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흘려 대속하는 '피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즉 죄란 하나님의 피 즉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계약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이든 숨길 수 없고 속일 수 없으며 그냥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죄가 정령 너를 찾아가리라 하셨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당장에 변화가 없다고 그것이 없어졌거나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피 심리에서 오는 자기 최면입니다. 현실은 그렇게 주저할 때가 아니라 일을 바로잡기 위한 반성이 있다면 이제는 그 늪에서 나와서 삶을 살려는 의지를 내야하는 것입니다. 범한 거짓들이 씻지 못할 죄로서 낙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경고와 그가 멸시하는 이방 사람들의 권면을 받고도 그저 자신을 숨기려고만 했습니다. 여러분 숨기고 감추는 것들은 참과 거짓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또한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은 참과 거짓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모두가 거짓의 아비 사탄의 다른 표정입니다. 아직도 죄를 숨기는 것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요나가 여기서 자복하고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바다는 잔잔해졌지 않았겠습니까? 요나가 앞으로 더 당할 일을 알았다면, 지금 죄를 속임으로 자신이 커다란 물고기의 환란 속에 거할 죽음의 문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가 정령 요나를 쫓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기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죄도 역시 나를 쫓습니다. 이 죄는 용서의 기회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죄는 지울 수 없는 낙을 남깁니다.
이 낙은 우리의 얼굴과 양심에 파고들어 씻을 수 없는 절망이 되게 합니다. 이 어두운 흑암 속에서 결단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실 같은 빛 일지라도 그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처로 썩어가는 팔과 다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어디서 고름이 터지고 구더기가 득실대는지 빛이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이라 원망 가득했지만 더럽고 추한 내 모습이 더 절망적이란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디를 씻고 깨끗게 할지를 알게 되며 더욱이 내 죄가 용서받을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는 것은 마귀의 고삐에 끝없이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고 합니다만 그앞이 바로 사망의 길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아니여도 내 판단은 나의 중심
하나님의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세상을 견주어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그대로 달려갈 수는 없었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빗댄 것이라면 하나님이 관여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부름에 세상적 판단으로 민족과 혈연의 정의를 걸고 만용을 부렸습니다. 내 판단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저울질했습니다. 우리의 안는다는 것은 모든 판단의 기준됩니다. 그러나 이 판단들이 순종을 방해합니다. 본질적인 순종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습니다. 설명이나 이해란 이타적인 것에 필요합니다. 머리가 손에 전하는 지시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부름은 주인이 종에게 하는 공생적 명령으로 일체의 기능적 관계입니다. 주님은 내 삶의 주체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그분의 부름에 답하는 것은 한 몸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누가 판단하게끔 합니까? 무엇을 근거로 다르다고 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귀는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리하여 주장합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독립하여 살겠다고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을 헐값에 팔아도 아깝지 않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가진 티끌만 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해 어리석은 결정으로 끌어갑니다. 여러분이 이해하려는 순간에, 판단하려는 찰나에 마귀에 뀜에 넘어갑니다. 베스트 셀러 서적 중에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란 책이 있습니다. 깊은 의미를 담은 한 문장의 책 이름만으로도 사색에 빠집니다. 그런데 한때 이 책이 이단의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책 제목의 질문은 삶 안에 있는 일상의 선택인 듯합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추하게 하는 질문의 의도는 알겠지만, 우리에게는 신적인 정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가 됩니다. 이 책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분별해야 할 곳에서 판단을 고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배움의 정도에 따라서 역량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피교육자의 판단이나 노력이 아니라 이미 귀속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 하는 판단이 아니라 이럴 때 성령의 역사가 우선합니다.
요나는 "이럴 때"에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런 어리석은 고집 때문입니다. 내 죄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죄를 조금은 이해해 달라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그러면 바른 회개를 볼 수 없습니다. 죄가 들통나도 이 죄에 대한 변명이 계속되는 것은 죄를 회개할 마음이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아십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죄를 숨기려 했습니다. 숨긴다는 것은 실수이기 보다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거짓을 효과적으로 포장하는 가장 악한 전략적인 전술입니다. 거짓은 하나님의 법, 참과 다릅니다. 요나는 이럴 때 모든 거짓을 내려놓고 진실한 회개가 돼야 했었습니다.
숨기는 자의 피곤한 눈
숨긴다고 거짓이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요나의 바다에서 뱃사람 모두가 기도 했지만, 풍랑은 잦아지지 않았습니다. 뱃사람들은 다시 의논하기를 우리 중의 이 죄인을 골라내어 진노의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이 재앙의 근원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나왔습니다. 드디어 죄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노련한 요나는 즉시 회개하지 않습니다. 정말 답답하리만큼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다그쳤습니다. 너의 무슨 연고로 재앙이 우리에게 임했는가를 고하라 합니다. 염치없어 입이 무거운 요나에게 사람들은 조목조목 물어보았습니다. 질문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요나의 진술이 단답형으로 성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실의 조각들에도 이 사람들이 그 사정을 다 듣고는 심히 무서워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게 진실이 드러났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멈추지 않습니다. 바다가 더 흉용해지자 무리가 요나에게 해법을 요구했습니다. 집요하고 간절한 그들의 질문에서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자들이 보이기 시작했을까? 요나는 사면초가의 현실에서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고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 결단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신만의 이기적인 대처였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그의 죄가 없어졌을까? 그가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나 하나 죽으면 다 되겠지하는 어리석은 생각들도 역시 사단의 선택지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결단에 이를 때까지 이용합니다. 우리가 심판날 생명책 앞에 서면 우리의 죄를 지금 보는 것 같이 낱낱이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 생명이 다할 날까지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의 시간이 곧 우리 집행 유예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는 것을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으로 죗값을 치르겠다 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 맘대로 회개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바른 회개, 참 선악의 길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나가 진정으로 이 거짓된 선악에 대하여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기 전까지 그는 사력을 다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심판이 곧 요나의 심판이 되었음을 알게 하시기 원했습니다. 거짓된 선악에 이끌려 참 회개의 길을 벗어났음을 호통하셨지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제멋대로 몸을 던졌습니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끝까지 요나를 살리려 애를 썼습니다. 노를 저어 육지에 그를 놓고자 했으나 바다는 더 험악해졌습니다. 마침내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 뛰던 바다가 그쳤습니다. 그 이방인들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서원하기를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죽었는데 이제 삶을 알 것 같아
요나는 큰 물고기에 삼켜지기 전, 대작하는 큰 물의 위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요행은 삶의 경험과 수단으로 넘겨왔지만, 물에 던져진 즉시 그 죽음이 당장에 목을 조였습니다. "큰물이 나를 두르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첬나이다." 요나 2장 3절. 거친 파도가 거세게 그의 머리를 수없이 내려쳤습니다. 여기 주의 파도란 각각의 인생의 바다에서 밀려오는 심판의 섭리를 말합니다. 즉 그는 이러한 처지에 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분의 의지들로 밀려왔고 도피의 과정 모든 곳에 섭리 된 여호와의 뜻이 계속 자신에게 불어 닥쳤다고 느꼈습니다.
그 끝에서서 이제 한 호흡만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간절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보겠다 합니다. 자신이 소망마저도 끊어진 심해 속에서 물결에 흔들리는 물풀처럼 버려졌고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불순종이 땅과 바다를 분리하는 빗장처럼 펼쳐졌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제물로 던져지고 넓은 바다에 흔한 물풀처럼 버려지고 이제는 깊은 심해 속에 잊혀 버리는 요나의 죽음과 심판에서 다시 주의 성전을 보겠다는 한마디에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으로 자신을 구원하신 여호와께 드디어 감격과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다시 얻은 주의 성전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주실 수 없는 지성소 였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심야를 회개로 채워진 감격과 찬양은 징벌과 정죄로 인한 고난의 물고기 뱃속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한 여호와의 품이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전체의 기도가 대부분 시편의 인용이라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삶 전체가 여호와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여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시편의 감동들이 진짜 찬양이 된 것은 그 곳에서 놀라운 여호와의 임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큰 물고기를 이미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명하여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완전한 운행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역경을 함께 하시고 다시 요나를 부르십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지라. 마치 부활하신 예수께서 3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신 하나님의 깊은 성품을 만납니다. 요나는 이제야 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삼일 길이나 되는 거대한 성으로 바벨론 보다도 현저히 컸던 세계를 호령하는 메타였습니다. 요나가 성안으로 하룻길을 가서 즉 도시의 중앙에 서서 외치기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가 지중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사역지에 서니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또 함께합니다. 니느웨의 백성들과 왕과 신하들이 일제히 상복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며 반성의 조서를 법으로 내려 온 성이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 한복판에 서서 성령으로 충만한 요나의 입에서 불같이 터지는 메시지에 수십만 명이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인구는 학자들이 연구한 면적당 인구수로 28만 명에서 32만 명가량이나 됩니다. 요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 중심에서 외칩니다. 천둥같이 쩌렁쩌렁한 그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요나의 강하고 담대한 자태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거기에 고래 배 속에서 사흘간 지냈던 요나의 피부는 온통 새하얗게 탈색되었을 것입니다. 이 순백의 신비로운 선지자가 사자후처럼 폭발하는 목소리로 그들의 치부를 낱낱이 찌르매 니느웨는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행보는 늘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만 요나의 니느웨 사역은 하나님의 예견하신 심판보다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와~ 세게 맞은 뒤통수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에서 부르신 첫 번째 말씀과 달랐습니다. 그 말씀은 니느웨의 악독을 경고하고 재앙으로 정죄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이 바뀌었을까? 문자 그대로 뜻을 돌리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예정은 바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변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판이 목적이었다면 요나를 파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이나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구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일축하셨습니다. 구원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모두 예정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영혼을 더 귀하고 소중히 합니다.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악독한 니느웨가 회개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내심 니느웨의 앞날을 예견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원수, 민족의 원수 니느웨가 하나님의 손에 쓰러질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보름 남았군, 그래 닷새만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야" 40일을 손꼽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성 동편 언덕에 초막을 짓고 성이 망하는 꼴을 두 눈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요나의 초막은 도단성에서 아람 군대를 홀로 대적했던 엘리사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분위기가 예루살렘보다도 신실해집니다. 성 전체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부흥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 회개는 성령의 감동하신 사역이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꿀 요나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과의 동역을 실망했습니다. 다 늙은 노 선지자가 죽을 고생을 몇 번이나 지내고 다시 사명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뜻을 거두셨다니 요나의 마음이 요동했습니다. 미움이 생기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기도했습니다.
니느웨는 창세기 10장 6절에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이 건설했습니다. 성경은 니므롯을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소개합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으로 전해지며 처음 바벨론 지역을 점령한 왕으로서 앗수르의 시조입니다. 니느웨는 바벨론 점령지에 세운 앗수르의 수도로 오랜 고대 도시였지만 BC 600년경 신 바벨론에 의해 함락됩니다. 4개의 내성으로 건설된 크고 튼튼한 성으로 건설되었지만, 함락 후 홍수와 자연재해 등으로 성의 자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집니다. 요나의 사역 후에 약 200년경에 처음 경고 그대로 니느웨 성이 무너져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니느웨의 회개가 지속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세대는 뜻을 돌이켜 유예했지만, 다음 세대는 다시 악이 가득했음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증들에 의하면 니느웨에 요나의 선포 이전에 역병과 지진등의 여진적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진적 재앙들 끝에 요나의 경고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결국에 다시 죄로 돌이켰던 니느웨는 무너졌습니다. 그 흉포한자들의 패망을 티그리스강 유역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선포하라 하신 그대로를 요나의 시간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 동편 언덕에 지은 초막은 뜨거운 광야의 열기를 피하기에 부족했습니다. 노 선지자 요나는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요나를 위로하기 위해 박넝쿨을 초막위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 그늘로 인해 요나가 기뻐하였으나 이튿날 벌레로 넝쿨 줄기를 씹게 하니 그늘을 주던 잎이 곧 시들어 버렸습니다. 뜨거운 해가 요나의 주름진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사명의 회의와 머리 둘 곳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차라리 죽는 게 좋겠다고 분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네가 잠시 즐겼던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자신이 이제 성내다가 죽는다 해도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대화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룻밤에 나고 시들어 버린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7세 미만의 어린아이가 12만 명이나 되는 이곳을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한가? 그 성냄에 진원을 물으셨습니다. 다시 돌아간 주님의 놀라웠던 성소에서 시들어 버린 박 넝쿨 이파리가 되었습니다.
요나서의 부끄러운 진실
앗수르는 당 시대에 거대한 나라였습니다. 지존 至尊의 고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격하는 죄 때문입니다. 다시스란 의미 역시 정련의 세계 즉 칼을 만드는 세상의 다스림을 의지하여 나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도전합니다. 유대가 오히려 스스로 회개하지 않으면서 회개하는 이방 민족을 시기하고 저주하는 완고한 교만에 하나님은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인의 유대인만을 위한 선민의식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타난 보자기의 음식처럼 사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 고질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오히려 더럽다고 치부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불손한 자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요나서는 요나의 길고 피로한 여정에 나타난 기묘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목에서 큰 물고기가 요나보다 중요하겠습니까? 그 속의 요나는 바로 그날 이스라엘에서 얼굴을 돌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훗날에 하나님의 흉배를 가슴에 차고 머리를 풀고 웃옷을 찢으며 "참람하도다" 소리치며 이르기를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나님의 법을 제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이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요나서는 신화 같은 모험이나 요나의 위대함을 품은 위인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나의 실수와 편견이 가득하며 그 배후에 숨어있는 인간의 죄가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자서전이나 역사를 이런 부끄러운 치부로 채우겠습니까? 요나서 4장 11절 마지막 말씀은 어떤 설명이나 마무리가 없이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 후에 요나는 성경의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요나의 부르심이나 큰 물고기의 부르심이나 요나서의 주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니느웨를 통해 이스라엘에 주시는 경고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오히려 앗수르 침략을 당위적으로 보완될 사건입니다. 요나서가 선지서에 포함된 것은 민족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호흡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선지서 중에 예언서가 아닌 예언자의 실무일지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태로부터 유전적으로 태생으로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그의 부르심 그와의 영적 접촉 모두가 기적처럼 놀랍고 기이하며 내 마음을 불처럼 뜨겁게 하며 우리 인생을 휘몰아치는 태풍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반드시 주님의 평안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뜨겁고 차가운 빗장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오늘의 현실과 하나님의 비전을 선 긋고는 진실이 아닌 선악을 두고 생명을 소비합니다. 요나서는 예언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기입니다.
(2023.0611.설교초고) (2023.0615.주석초고) (2023.0627.수정중)
본 글은 이야기 성경 주석으로 집필 중인 글입니다.
Follow U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